여기 어느 누구도 늘봄님이 자랑하시듯 좋은 대학 출신이고 새로운 사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늘봄님의 모든 글들은 늘봄님의 "신학"을 선포하는 늘봄 "선교사"를 자처하신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늘봄님은 계속 해서 어느 대학 출신이고 목회를 몇 십년 했다고 주장하시는 것이 과연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늘봄님께서 매길대학에서 신학과 비교종교학을 하셨다고 하지만, 제가 단언컨대 늘봄님의 글에는 비교종교학을 공부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가령 거기에 Arvind Sharma라는 위대한 종교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힌두교도이면서 힌두교를 선포하는 선교사가 아니라 자기 종교의 신념을 가급적이면 판단 중지하고 종교를 비교론적으로 연구합니다. 이런 분에게 비교종교학을 제대로 배우셨다면 타자(근본주의적 신앙을 포함해서)와 대척점을 만드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http://www.amazon.com/s/ref=nb_sb_noss?url=search-alias%3Daps&field-keywords=Arvind+Sharma 저는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늘봄님의 어떤 글에서도 비교종교학적인 인식론적 고민이이나 방법론적 추구를 단 한 줄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비교종교학은 경험적 학문이고 최대한 자신의 형이상학적 진술이나 자기 주장을 배제합니다. 종교학은 근본주의적 종교인을 위협하거나 진보적인 종교인들을 즐겁게 해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종교 현상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연구하면 되는 것이구요. 이런 면에서 세속대학에서 저는 신학부가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부터 이번 주 초까지 미국 조지아주의 애틀란타에서 열린 American Academy of Religion의 모임에 다녀 왔습니다. https://www.aarweb.org/2015-annual-meeting-in-atlanta-nov-21-24 수많은 세션 중에서 "신학과 종교학"의 가치와 거리에 대한 토론이 있었는데요. 어느 여성 패널리스트가 세속대학에서 신학적 작업은 extra curricula 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있는 주장을 했는데 동의하구요.
현재 세속대학에 신학부가 있는 것은 원래 학교들이 신학교에서 시작했거나 기독교가 주류이던 시절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세속대학에서 신학하는 사람들하고 종교학 하는 사람들하고 잘 지내기도 하지만 갈등을 일으킵니다. 순수하게 종교학으로 출발한 UC Santa Barbara나 캘거리대학에서는 신학부가 없기 때문에 이런 갈등은 없구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는 한 때 신학훈련받은 학자들이 종교학과를 좌지우지했었는데 요즘은 거의 완전히 정리되서 그런 갈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서강대는 종교학과에 신학부와 종교학부가 함께 있는데 부드럽게 잘 흘러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종교학과 신학은 상호 보완 관계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종교학은 늘봄님과 같이 진보적인 신학적 주장을 하는 분들의 새로운 신학적 상상력에 신선함을 느낄 수 있고, 신학하는 사람들은 종교학이 갖는 경험과학의 방법론적 고민을 받아들여야겠죠. 그렇지 않으면 세속대학에서 신학의 자리는 무의미하고 없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학은 신학교에서 불교는 불교학교에서, 이슬람은 이슬람 학교에서 가르치면 되구요. 왜 세속대학에서 특정 종교의 신념을 주장하는 내용이 통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별로 없습니다.
제가 위와 같이 좀 장황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늘봄님의 주장이 이 게시판에서 의미 있으려면, 늘봄님 스스로 선교사 역할보다는 당신의 주장을 타자를 존중하면서 주장하시면 될 듯하구요. 내가 아는 분야를 자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비판하는 타자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중요합니다. 가령, 종교는 뇌작용에 불과하다고 융을 끌어오시는 오류는 치명적이구요. 본회퍼의 사상에 대한 전후에 대한 언급없이 내식으로 해석하면 안되구요. 기독교 역사 1700년을 부정하시는데 왜 그런지 차분히 설명하실 필요가 있구요. 그렇지 않으면,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만 읽고 이런 주장하시는지 오해받으실 수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 신앙이라고 하시지만, 역사적 예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무시하고 늘봄님 좋아하시는 것만 소개하면 지적 정직성에 치명적이구요. 천국과 지옥은 교회의 은폐와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중세와 르네상스를 잇는 이탈리아 시인 단테의 중요성을 전혀 모르는 분의 진술이구요.
건설적인 질문과 대화를 물고 늘어진다고 짜증내시지 말고, 먼저 늘봄님께서 쌓아두신 "업보"(karma)를 푸실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에 대한 토론은 목회경력이나 신학적 배경, 종교학적 배경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내용을 통해서 자기 주장을 전하는 것이죠. 여기에 종교적 진술이 의미있으려면 자기 신념에 대한 독단론적 주장 대신 그 현상의 설명과 이해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제가 급진적으로 이야기하는 초점은 이제는 '믿는 것' 보다 '어떻게 사는냐' 가 더 중요하다는 저의 신앙과 신학을 피력했을 뿐입니다. 21세기에는 '믿는 하느님 보다 스스로 깨닫고 정직하고 양심적이고 상식적으로 사는 참 인간이 훨씬 더 귀하다' 는 것을 밝히려고 온갖 애를 썼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무신론자 또는 이단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21세기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무신론자, 회의론자, 이단 이란 말을 듣지 않고는 불가능한 현실입니다. 저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밖으로 많이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한인교회 서양교회를 통한 저의 20년 전문목회에서 과거의 패러다임에 갈등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저의 표현이 독선적이고 극단적이라고 들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98%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신성과 하늘 위의 초자연적인 하느님과 죽은 후의 천당과 현세에서 하느님의 물질적인 축복을 믿는데, 2% 중의 한 사람인 제가 그런 믿음, 그런 예수, 그런 하느님, 그런 천당, 그런 축복, 그런 징벌, 그런 지옥이 없다고 하니 이단적으로 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내사랑아프리카님은 98%에 들어갑니까 아니면 2%에 들어갑니까? 이것이 기분을 상하게 하는 질문이라면 죄송합니다. 답변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예수의 신성, 예수의 기적, 초자연적인 하느님 등등을 믿는 기독교인들을 나의 이단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체계가 만든 그런 구원의 교리들에 순종하고 믿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을 반대할 뿐입니다.
믿고 싶으시면 그렇게 믿는 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저의 신앙은 간단합니다. 믿는 것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훨씬 더 소중합니다.
메길대학 종교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나는 왜 믿어야 하는가? 무엇을 믿어랴 하는가,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믿으면 어떻게 되나? 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볼때에 이단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 역사적 예수, 인간 예수의 길을 따르려면 이단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목회하는 동안 교인들에게 그리고 지금도 앨버타의 이웃들에게 '하늘 쳐다 보는 믿는 이야기' 그만 하고, '오늘 우리가 함께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요청합니다.
내 사랑아프리카 님은 기독교인 뿐만아니라, 종교 경계 넘어, 인종 경계 넘어, 성적본능 경계 넘어, 남북한 경계 넘어, 보수진보 경계 넘어, 온 인류가 함께 화평하게 행복하게 자유하게 살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의 질문에 답변하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침묵의 명상 속에서 생각해 봅시다. 언제 기회가 되면 생각한 것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