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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시내 운의 여성적 기억 이론
작성자 시내 운     게시물번호 -1681 작성일 2005-08-22 10:59 조회수 1164


김 창한 님 감사 합니다

저의 졸시를 좋아 하신다니 저 또한 좋군요

이토록 깊이 시를 감상하시는 분이 가까이 계신것도 좋구요

저의 시심을 너무도 꾀뚫어  보고 계신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구요. 저도 님의 글을 빼 놓지않고 읽고 있읍니다

항상 우리가 닿지 못하는 부문을 열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건강 하소서


☞ 김창한 님께서 남기신 글


시내 운의 "여성적" 기억 이론

-김창한


[외 갓집 가는 길]
 
- 시내  운
 
산 자락 밟고
산 등성 돌아
개울 건너
꼬불 꼬불 시골 길
한나절을 걸으면
내 어머니의 탯줄이 묻힌곳
외 갓집 있네
 
어머니가 빼어 닮은
허리 굽은 외 할머니
사시는 곳
배부롱산 자락
조그만 촌락
밤나무 우거진 만닥골
외 할머니 내 손잡고
웃 배미 아랫 배미 돌며
손주 자랑 펴시네
 
저녁 말미
여물 끓이는 냄새
뜰안에 가득하고
폭 삶은 감자 고구마 옥수수  참외 수박
함지박에 수북히 고이고
멍석에 둘러 앉아
왕 이된 나
외 갓집의 정취를
뇌리에 붓칠 하며
어머니의 어머니
넘치는 사랑이
코 끝에 찡하다
눈물샘 터지게 하네


내가 시인 시내 운의 시을 좋아하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그의 시들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그의 시는 민중적이다. “민중” (民衆)이란 말은 그 말이 함의하듯, 사람들의 무리, 그것도 지배 세력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무리를 일컫는다. 이런 민중이 집단적 소리를 낼 때, 민중의 함성, 즉 집단의 함성이 된다. 그런데 시내 운의 민중적 정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집단성이 없다. 오히려, 민중 각 개인의 고통과 삶의 어려움이 섬세하고 세밀하게 묘사된다는 것이 바로 시내 운 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시내 운의 시 안에 민중은 누구나 공감하는 보통 사람들의 흐느낌이거나 울부짖음이 절제되고 정제된 시어를 통해서 드러난다.

둘째, 그의 시는 여성적이다. 시내 운의 시 어디에도 여성해방적 울림이나 이데올로기적 선동이 없다. 그런데, 그의 시들은 당연시되어 온 남성 위주의 삶에서 잊혀진 여성적 정서를 담는다. 그러므로 그의 시가 참여시로 가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시내운의 “외갓집 가는 길”은 바로 내가 분류한 두 번째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겉으로 보면, 어린 시절의 단순한 회상기다. 산골의 소년이 오랜 만에 산너머 사는 외갓집을 방문하는 소위 “여행기다”

산 자락 밟고
산 등성 돌아
개울 건너
꼬불 꼬불 시골 길
한나절을 걸으면
내 어머니의 탯줄이 묻힌곳
외 갓집 있네

그러나 그의 시의 구조와 각 연에 배치된 단어를 보면, 이 것이 단순히 어린 시절 회상기가 아님을 담박에 알 수 있다.

우선, 나의 어머니는 평범한 시골 아낙이다. 어머니의 친정은 어린 내가 한 나절을 걸을 수 있는 짧은 거리에 있는 산너머 이웃 마을이다. 어머니는 그런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고, 또 그렇게 살다가 성년이 되어 이웃 마을로 시집을 왔다.
그런데 시내 운은 이런 어머니의 평범한 삶 속에서 우리 삶의 근원을 묻는다.  그래서 이 제 1연의 마지막 두줄, “내 어머니의 탯줄이 묻힌곳/ 외 갓집 있네” 는 섬뜩하리만치 우리를 놀라게 한다. 아직 철들지 않은 내가 어머니의 고향을 찾는 것이 어린 내가 외가에 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어머니의 탯줄이 묻힌 곳”이라는 것이다. 내 어머니의 삶의 출발점이 된 곳, 즉 어머니의 “탯줄=외갓집”인 것이다.

그래서 제 2연에서의 소년의 외침은 놀라울 것이 없다.
어머니가 빼어 닮은
허리 굽은 외 할머니
사시는 곳
배부롱산 자락
조그만 촌락
밤나무 우거진 만닥골
외 할머니 내 손잡고
웃 배미 아랫 배미 돌며
손주 자랑 펴시네

그래서 그 외갓집에서 어머니를 낳은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빼어 닮은 분”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시에서 외할아버지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소년은 외가를 방문하므로써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된다. 그는 그 동안 자기 삶의 진정한 근원을 깊이 있게 자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산 너머 새로운 세계, 자기를 낳은 어머니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바라본다. 마치 죽은 미이라가 다시 소생하듯 이 세계는 소년을 편안한 행복 또는 기쁨으로 어머니처럼 감싸 안아 준다.
 
배부롱산 자락
조그만 촌락
밤나무 우거진 만닥골
외 할머니 내 손잡고
웃 배미 아랫 배미 돌며
손주 자랑 펴시네

그러고 보면, 외가는 유년기의 기억 중에 가장 오래 남고 지속적인 실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나”의 친가와 상반된 구조를 갖고 있다. 친가를 대표하는 것은 할아버지고, 그 할아버지의 아들인 아버지가 친가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별로 이 자리에서 쓰고 싶지는 않지만, 여기서 “나”는 이런 가부장적 구조의 장손쯤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같다. 즉, 할아버지-아버지-아들인 나라는 가부장적 구조의 형식적이고 엄격한 “체제”를 생각해 보자. 그런 가운데서도 어머니는 이런 딱딱한 구조에 숨통을 트는 통로 (conduit) 였다. 그런 통로가 바로 시내 운의 “외갓집 가는 길”로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이 시의 제목이 “외 갓집 가는 길”로 적합하지는 않다. 그것은 이미 제 1년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그런데 왜 시인은 이 제목을 고집했는지는 위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외갓집 가는 길”은 전이 (transition)의 은유를 갖고 있다. 내 아버지의 마을과 내 어머니의 마을의 “경계선” (boundary)이 바로 “가는 길”인 셈이다.
이 전이의 다음 단계인 제 3연을 보자.

저녁 말미
여물 끓이는 냄새
뜰안에 가득하고
폭 삶은 감자 고구마 옥수수  참외 수박
함지박에 수북히 고이고
멍석에 둘러 앉아
왕이 된 나
외 갓집의 정취를
뇌리에 붓칠 하며
어머니의 어머니
넘치는 사랑이
코 끝에 찡하다
눈물샘 터지게 하네

이 것은 가 유년기를 그리워할 때, 가부장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이상향으로 생각할 수 있는 낙원에의 향수 (nostalgia) 라고 할 수 있다. 여기는 어떠한 사회적 통제 (social control)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관습적 (conventional) 장치가 없다. 평화롭고 조용한 산골 마을의 전경, 즉 “저녁 말미/ 여물 끓이는 냄새 /뜰안에 가득하고 /폭 삶은 감자 고구마 옥수수  참외 수박/  함지박에 수북히 고이고/ 멍석에 둘러 앉아” 있는 것은 한 폭의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그 낙원에서 단연히 중심 인물은 나다.
“왕이 된 나”

그런 낙원에서 왕 대접을 받는 나. 이제 성인이 되어 (그런 원형에서 이탈된).
타향 또는 이국 생활의 고달픈 삶을 사는 내가 그 때가 바로 내 삶의 근원이자, 내가 가장 행복했던 낙원이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흐느낀다.

외 갓집의 정취를
뇌리에 붓칠 하며
어머니의 어머니
넘치는 사랑이
코 끝에 찡하다
눈물샘 터지게 하네

그 흐느낌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내가 잊고 있었던 근원에의 자각, 그렇지만, 그것은 늘 기억의 구석에서 끄집어 내야 하는 여성인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다. 그리고 내 존재 형성의 진짜 근원인, 할머니를 시인은 이렇게 가는 실처럼 기억으로 이어낸다.
 “어머니의 어머니넘치는 사랑이 코 끝에 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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