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 안희선
어디에서 옮겨 온 촉촉한 영혼일까
아름다운 모험의 꿈 하나 짊어지고
발도 없이 걷는다
천천히 미끄러져 떨구는 너의 조화(調和)는
유난히 외로운 눈망울에 맺혀,
돋은 뿔 위에 그리도 선명히 장식할 수 있었나 보다
진정 다정한 행위일수록 서둘지 말아야 한다고
미세한 정신으로도 명백히 깨달아지는 삶이어야 한다고
재빠른 발이 없어도 길을 가는 꿋꿋한 마음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너는, 한시도 겸양의 수축(收縮)을 잃지 않았다
촉촉하고 시원한 아침의 공기가
어둡고 검질긴 밤을 거쳐왔듯이
너의 내적(內的)인, 그러나 쓰디 쓴 동작(動作)의 메아리는
오늘도 느리게 느리게 울려 퍼진다
뉘우침과 허물많은, 이 세상의 소요(騷擾) 속에
내가 아는 시인 중 영혼이란 말을 가장 많이 쓴 시인이 아닐까 싶다.
사용면에서도 그렇다면 지금쯤은 다 닳았을지도 모른다.
애지중지하는 것일수록 감추고 싶은 법인데, 시인은 왜 그토록 영혼의 이이야길 반복했을까.
시각에 따라 실체가 다르게 보이기도 하는 법.
고전이냐 현대냐를 자연에도 적용하는 사람들은 화자話者의 달팽이를
클래식 쪽에 놓을 것 같다.
어쨌든 느리게 걷기의 대가인 달팽이가 깡총깡총 뛰었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다.
발도 없이 태어나 왜 또 그리 오래 걸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자기 길을 가기 위한 것이었다니...
진리는 언제나 역설(Paradox)로서만 다가온다는 들뢰즈의 말이 맞는 거 같다.
가장 느리게 가는 것이 가장 빠르게 가는 길道.
예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인도 영혼의 속도로 빨리(천천히?) 그리고 오래 직립하길 빈다. <시인 오정자>
- Oh! 시인께 먼 곳에서 희서니가 감사하다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