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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오리라 질문에 대한 답변
작성자 ezrason     게시물번호 12504 작성일 2019-11-18 22:55 조회수 2604

prosperity님이 질문하셔서 답변드립니다.... 제가 바빠서 혹시 질문을 하셔도 답을 못할 수 있으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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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은 1023절에 "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 그 후 2,000 여년이 지나도 예수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얼마를 더 기달려야 이 세상에 다시 올까요? 200만년을 더 기다려야 됩니까, 20억년을 더 기다려야 됩니까?

 

혹시 저자가가 잘못 기록한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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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4가지로 설명하겠습니다.

1. 제자들의 인식의 변화

2. 이스라엘의 저조한 복음화율

3. 바울의 근심

4. 복음전파에 대한 강조

 

1. 제자들의 인식의 변화

성경은 다중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의 흐름을 따라 확장되어 적용됩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의 정상에 올라서면, 또 다른 산이 저 멀리 보이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1차 청중을 넘어 2차 청중들에게도 확장되어 적용하도록 선포된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1차 청중들은 예수님의 12제자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고,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배타적인 민족주의는 이스라엘을 넘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의 의식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대상, 그 세계는 오직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아직 사역 초기였던 것을 감안하면 제자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에게 있어서 전부였던 세계, 이스라엘을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500여 형제에게 보이시고,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에는 제자들도 의식이 성숙한 시점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6~11

6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0장의 내용과 의미들이 정확히 일치하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 지역이 확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6)”라고 묻습니다. 여전히 그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이스라엘 땅이 전부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뛰어 넘어 땅 끝까지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고정관념을 뛰어 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도, 사도행전 1장도 모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분명 차이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1차 청중들은 틀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번복하셨다고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복음전파의 영역이 바뀌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기한도 바뀐 듯 보이지만 그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예루살렘부터, 온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소아시아, 유럽, 그들이 생각하는 땅 끝으로 복음을 전파하러 나아갔습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사이자, 기도문이 등장합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오실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저조한 복음화율

현재 이스라엘은 세계 나라 중에서 가장 저조한 복음화 율을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지금도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할 마을들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덧붙이자면 복음의 출발이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였기에 지구는 둥구니까 땅 끝도 시작점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겠습니까?

잘 알 듯이 지금 예루살렘성전이 있던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3. 바울의 근심

성경을 읽었다고,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바울을 좋아한다고 말들을 합니다. 필자도 바울을 존경합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늘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생각하며 근심에 잠기곤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로마서 11:13~14, 25

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25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울은 이스라엘의 구원 받는 순서가 이방인의 뒤로 밀려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방인 >>> 이스라엘

 

 

4. 복음전파에 대한 강조

마지막으로 강조화법입니다.

 

어렸을 때 어머님은 외출하시면서 말씀하셨다. 금방 돌아올 테니 방을 청소 해놓으라고... 어머님은 금방 오시지 않으셨다. 물론 어머님은 오시긴 오셨다. 아주 늦게..... 어머니의 말씀에서 강조하시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고, 변치 않는 사실은 무엇일까? 여기서 강조 하신 것은 방청소분명한 사실은 다시 오실 어머니”...... 이때 어머니에게 왜 늦게 오셨느냐고 따졌다가는 매 맞는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전도와 재림을 연결해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복음을 전해라”, “내가 다시 오리라마태복음 24장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처럼 복음전파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상호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언제 오실지 날짜를 따지는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앞당기는 길인 것입니다.

 

이상으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손승희목사

캘거리사랑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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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sperity  |  2019-11-19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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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긴 설명 잘 들었습니다.
시간 내시여 긴 설명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재림이 과연 실현될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남습니다.

prosperity  |  2019-11-19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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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네 생물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은 각각 여섯개의 날개와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였다고 적혔고 어린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갖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런 동물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어니 신화의 내용이라 판단 할수 있겠습니다. 성경에는 신화의 내용이 다수 포함 되여 있다 말할수 있겠습니다.

clipboard  |  2019-11-19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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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님,

ezrason 님은 자기도 모르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한 가지 하셨습니다.

경전에는 다중의미가 있고, 듣는 대상에 따라 다른 각도의 다른 언어로 전파될 수 있다는 말이 그것 입니다.

즉 예수선생이 사람들의 수준이나 처지에 따라 다른 언어로 가르침을 주었다는 말로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제가 7 년 전 쯤 비슷한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조금 줄이고 다듬어 부연설명을 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기독교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만, 그저 제가 접한 적이 있는 상식선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예수의 사망 이후 형성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Gnosticism 전통으로부터 출발했을 것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외경 뿐 아니라 정경으로 채택된 3 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만 읽어보아도 그 전통의 편린을 쉽게 포착할 수 있습니다.

다만 4 복음서에 나타난 영지주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문장만으로는 확신이 서지 않았던 그 초기 전통이, 나그함마디문서 등 나중에 추가로 발견된 문서 덕분에 더욱 분명하게 재해석할 수 있게 되면서 그런 심증을 얻게 된 것 입니다.

그러고보면 아무래도 불교가 기독교의 형님종교가 아닐까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지금은 일부 보수기독교인들만 빼고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CE 4 세기 경에 로마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완전히 교권을 장악한 문자주의자들의 일방적인 거짓말만 믿고 ‘나스틱’ 전통이 나중에 생겨난 이단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게 아니라는거지요.

문자주의자들은 개인의 영적 깨달음을 강조한 나스틱 사상이 중앙집중권력구조에 개뿔도 도음이 안 된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한나머지 엉뚱한 ‘매개 사상 즉 -교권을 통해서만 또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을 제작해 낸 것 입니다.

문자주의자들, 그러니까 이 자칭 정통주의자들이야말로 거대한 이단일지도 모른다는 ‘매우’ 강력한’ 심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21 세기를 사는 보통사람들이 듣기에는 말도 되지 않는 개소리에 가까운 명제들을 아직도 교리라는 이름으로 섬기고 있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런 건 제가 알바가 아니고 그런 종교현상을 이상하게 생각할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그건 그들의 비즈니스 입니다. 그대로 존중해 드려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부연설명으로 돌아와서,,

예수가 불교의 가르침과 유사한 깨달음의 ‘영적 지혜’를 설파하고 있었다는 방증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문장은 굳이 외경을 언급할 것도 없이 4 복음서 곳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장 신약 초반에 등장하는 마태복음 13 장만 읽어보아도 예수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있지요. 아시다시피 마태복음 13 장은 저 유명한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입니다. 그 장 11 절에서 예수는 이런 말을 하지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마치 사람 봐 가면서 차별해서 이야기하겠다는 말로 들릴 수 있는 이 말은 나중에 발견된 The Gospel of Thomas 제 9 절에 나와있는 ‘씨뿌리는 비유’를 비교해서 읽고나면 비로소 그 의미가 명확해 집니다.

예수는 어려운 주제를 이야기할 때나 일반 대중을 상대로 이야기할 때는 주로 비유로 말하는 대신, 근본적인 물음에 해답을 구하는 소수의 영적 엘리트들에게는 따로 이야기하기도 했다는 것이 나그함마디 문서 등을 통해 드러났지요. 마태복음에서도 같은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의 행적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만을 보았을 때는 예수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뭔 소리인지 긴가만가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들을 준비가 된자 와 그렇지 않은 자 에 대한 비유”라는둥 대충 통밥으로 주워섬긴 주먹구구식 해석을 해 왔는데, The Gospel of Thomas 같이 ‘높은 수준의 자아’로 그 ‘들을 자격’을 제한하고 있는 고급강의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그 의미 (구체적으로 예를들어 마태복음 13 장 11 절의 의미) 가 보다 확실하게 드러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 전체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영적 부활’의 전기를 맞은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자칭 정통주의자 입장에서 보자면 한마디로 그들 스스로 ‘딱 걸린 것’ 이지요.

바울은 정통주의와 나스틱 전통 두 교파 모두로부터 귀빈대우를 받고 있는 특이한 인물인데다가 신약 27 편 중 7 편이 그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을만큼 중요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디모데전서나 디도서 등 나머지 6 편은 후대에 가필되었거나(앞의 7 서신도 일부 가필의혹) 날조된 문서라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들도 바울과 관련된 문서들입니다. 그것들까지 치면 열 세 편, 신약성서의 거의 절반에 육박합니다.

후대에 재해석된 그의 기독론에 관계없이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일관되게 ‘육적 수준의 그리스도인’과 ‘영적 수준의 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비유를 줄기차게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직 높은 수준의 자아로서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실망감의 노골적인 표출이 편지 내용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입니다. 대표적인 부분은 히브리서 5 장 11 절부터 6 장 전체에 면면히 이어지는 질책입니다.

바울이 나스틱 사상의 영향아래 있었다는 것을 슬며시 나타내주는 문장은 갈라디아서에 나와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의 어정쩡하고도 추상적인 해석때문에 그 확실한 의미가 평신도들에게 가리워져 있는 구절이 이 편지에 있는데 바로 갈라디아서 3 장 19 절 부터 20 절 입니다.

What purpose then does the law serve? It was added because of transgressions, till the Seed should come to whom the promise was made: and it was appointed through angels by the hand of a mediator. Now a mediator does not mediate for one only, but God is one.

만일 전통 신앙을 가지고 있는 평신도들이 그 확실한 의미를 알면 까무러치거나 놀라자빠질만한 이 구절은 바울의 폭탄선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혁명적인 발언입니다. 율법을 준 여호와 를 가리켜 mediator 라고 했습니다. The Mediator 도 아니고 일반명사를 사용하여 a mediator 라고 호칭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평신도들이 일부러 못 알아듣게 하느라고 그랬는지 ‘중보’라는 애매하고 어려운 단어로 해석을 해 놓았는데 그냥 ‘중재자’나 ‘전달자’ 정도로 해석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율법을 배달해 주는 퀵서비스라고나 할까요?

교권주의자들은 마치 신도들을 율법에서 해방시킨양 말하고 있지만, 전통적 의미의 기독교인들은 율법보다 더 한 이른바 '믿음'이라는 더욱 더 해괴망측한 족쇄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처지가 된 것 입니다.

정경으로 채택된 이 바울서신에서도 믿음에 이르면 몽학선생(유치원선생)의 가르침을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으니 이 깨달음으로 고치면 기독교가 자가당착에 빠진 교리에서 해방되어 좀 더 자유로운 종교로 거듭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그저 기독교인이 아닌 제 3 자로서 하는 말이니 그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되고요.

변영님께서는 지금까지 한국 교회 교역자들이 한 말들이나 전통적 교리의 틀에서 일방적으로 제공되어져 온 '몽학선생들의 허튼소리들'에 얽매이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일단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의식의 transformation 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니 얼마나 좋은 일 입니까? 소위 그 '믿음'이라는 해괴망측한 족쇄에서 해방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이니 말 입니다.

아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분들은 그들이 할 일을 하게 하면 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실 전환의 계기를 마련한 분들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됩니다.

이 세상에 억지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론장에서 종교 이야기 더 이상 안 합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9-11-19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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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기 글 쓰시는 분 들 중에서 클립보드님은 종교에 대해서 해박하고 정확한 이해를 있다고 봅니다. 밑에 에즈라선님께서 “clipboard 님의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댓글은 구약과 신약에 대한 이해가 좀 부족함에서 비롯된 글인 것같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저는 공감하는 마음이 현저히 낮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신학이나 선교(전도) 또는 자기 신학적 이념 전파 이슈를 빼고 보조. 그렇다면, 성서나 기독교에 대한 토론은 종교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나 문헌학을 논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적 예수는 종교적인 기독교의 예수가 아니라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고 성서형성사 역시 신학적 주장이 아니라 역사적 문헌학적 역사라 봐야하기 때문에 기독교이이든 아니든 누구든 예수와 성서에 논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요. [나그 함마디 문고] (Nag Hammadi Library)의 소장자 또는 소장 집단은 종교집단이라기 보다는 독서클럽 멤버에 속한다고 봐야 합니다. 이 문고의 내용이 너무나 다양해서 하나의 일관된 주장을 펼치기기 극히 희박합니다. 이런 면에서 영지주의로 대략 분류되는 사람들은 요즘 인기 있는 Deepak Chopra 추종자들 정도로 생각하면 될 수 있을 것 같구요. 신지학회처럼 이런 비의적인 운동으로는 만개된 종교운동으로 발전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이런 비의적 운동이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종교집단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영적인 면을 추구하는 사람들 즉 spiritual seekers에게는 의미 있다고 볼 수 있죠. 성서형성사에서 영지주의 문헌은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역사를 연구하고 이해한다는 면에서 신학적 입장이나 이념보다는 우선 문헌의 발굴과 그 역사적 연계성에 방점을 둬야 한다고 봅니다. 맨날 콘스탄틴 기독교 이야기 하고 니케아 이야기 하면서 영지주의가 무지막지하게 박해를 받았다는 과장은 뒤로 해야 됩니다. 콘스탄틴 기독교 공인 이전에 강력한 종교 운동으로서의 영지주의 운동이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말시온 운동이나 몬타나 운동 외에는 거의 없다고 봐야죠.

ezrason  |  2019-11-19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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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sperity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해서 이 말씀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8~10절
8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다음으로 "어린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다는 말로 인하여 성경이 신화라는 말에 대해서...
성경은 시, 역사, 계시, 비유등 여러 장르로 되어있습니다. 비유는 비유로, 역사는 역사로, 계시는 계시로 해석해야 합니다.
계시록은 요한이 밧모섬에서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계시입니다. 요한이 묘사하고 있는 여러 형상들에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이 표현 할 수 있는 최선의 묘사일 것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일곱뿔과 일곱 눈을 가졌다고 표현한 것은 7은 완전 수, 뿔은 권세, 눈은 세상을 통치하는 분, 그러므로 예수님은 온전한 권세를 가지셨고, 온 세상을 살펴보시며 통치하신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요한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인 것이죠.

clipboard 의 제가 저도 모르게 중요한 이야기를 한 가지 했다는 말씀에 대해서
저도 모르게 한 것이 아니고 사실을 말씀드렸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다중의 의미를 그렇게 오해해서 생각할 수도 있으시겠다 생각됩니다.
하지만 제가 드리는 말씀의 의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여러 힌트를 통해서 동일한 목적지를 찾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은 부분만을 가지고 억지 해석을 하려고 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경전체의 흐름에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방법인 것입니다. 성경의 난해구절들은 성경 앞뒤 문맥이나, 전체의 문맥에 의해서 해석될 수 있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지식으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차원이 다른 세계입니다. 믿어야 알 수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어떤 건물 밖에서서 건물을 다 안다고 아무리 말해도 사실은 겉모습만 보는 것입니다. 건물안에 들어와서, 들어왔다는 것은 믿는 것입니다. 무너지지 않고 안전하다는 것을 믿기에 건물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건물의 내부 구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겉에서만 보던 건물이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건물을 알아가며 누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18, 22~25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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