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능진은 평안도에서 1899년 태어났다. 그 당시 평안도는 중국을 통해 서양문물이 들어와서 개화 지식인들이 많았다. 최능진 집안도 기독교를 믿는 부유한 개화 지식인 집안으로 1917년-1929년 미국에서 유학을 했다. 그는 듀크 대학 체육학과를 졸업했다.
최능진 집안은 형제들이 독립운동을 했고 최능진도 미국 유학시 흥사단 회원이었고 귀국해서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선고 받기도 했다. 해방 후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을 했다.
월남해서 목격한 남한의 현실은 최능진이 보기에 한심하고 어이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일제에 부역하던 친일 경찰들이 해방되어서도 여전히 위세가 당당한 경찰이었다. 최능진은 경찰에 투신했다. 뛰어난 영어실력의 미국통인 최능진은 군정청을 통해 새로 신설된 경무부의 수사국장이 되었다. 경무부장은 조병옥으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같이 감방 생활을 했다.
최능진은 친일경찰을 색출해 사표를 받다 수도청장 장택상, 경무부장 조병옥과 갈등을 빚었다. 최능진은 “경찰의 80%가 친일경찰인데 이 자들을 그냥 두면 국민 80%가 빨갱이 된다.”면서 친일 경찰을 색출했다. 일제에 부역하며 독립군 때려잡던 자들이 반성없이 경찰이 되어 국민 위에 군림하려드니 민심이 수습될 수가 없었다.
대구폭동이 일어났다. 대구폭동의 주모자 중 한명인 박상희는 박정희 형으로 김종필 장인이다. 대구폭동에 대해 최능진은 “폭동은 잘못 된 것으로 진압되어야 하지만 경찰이 갖고 있는 내재적 모순이 폭동의 한가지 원인이다.”라고 군정청에 보고했다.
친일 경찰을 옹호하는 장택상, 조병옥에 맞선 최능진은 결국 경찰을 떠났다. 이럴 때 경제 용어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라고 말한다.
그후 김구, 김규식과 교류하던 최능진은 단독정부에 반대하고 남북 통합정부 구성을 지지했다. 민족주의자로서 당연한 선택이었다.
5.10 선거가 다가왔다. 이승만은 동대문 갑구에 출마했다. 일단 국회의원이 되어 원 구성을 마치면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는데 이승만이 유력했다. 그런데 미국 생활을 하면서 이승만의 이중성과 교활한 성격을 잘 아는 최능진은 이승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