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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하기 싫어. 나의 은퇴는 부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야

작성자 떠돌이 게시물번호 18927 작성일 2025-05-19 18:02 조회수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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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일상이란 건 없다.

 

느닷없이 코로나라는 역병이 돌고,

존 스튜어트 밀을 읽어 본 적이 없을게 틀림없는 고국의 위정자가 뜬금없이 계엄령을 선포하여 일반 서민의 삶을 격랑 속에 몰아 넣고,

억만장자로 태어나 여러 번 사업 실패를 경험한 인물이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 신통치 못 한 경영 능력으로 관세를 통한 무역 전쟁을 일으켜 세계 경제를 혼돈 속에 몰아 넣고, 막 그런다.

 

앞으로 또 어떤 황당한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똑같이 개인적인 삶도 출렁인다. 갑자기 가족 누군가가 아프고, 쓰러지고, 사고를 당하고, 실직을 하거나, 망한다. 아내와 나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한국으로 달려가야 한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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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삶은 굴러간다. 전지구적인 사건과 개인적인 사건이 울퉁불퉁 흔들리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의 끝자락을 향해 굴러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 끝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아들은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얼마 안 있어 인공지능에게 대체될 가능성이 높지만, 하여튼 지금은 고연봉자다. 따로 친구도 없고 연애도 안 하면서 집과 회사만 오가며 꽤 많은 돈을 모았다. 욕심만 안 부린다면 녀석은 5년 정도 후에 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를 할 정도로 저축이 가능할 것이다. 30대 중반에 은퇴가 가능하다니, 부럽다.

 

올 초에 갑자기 한국을 가야 할 일이 생겼다. 한 달 후 다시 캐나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놀고 있다. 다시 일을 잡아야 하는데, 왠지 그러기가 싫다. 조기 은퇴를 할까 생각 중이다. 하지만 연금이 나오기까지는 아직도 엄청나게 긴 시간이 남았다. 어쩔 수 없이 현금흐름을 어떻게든 만들어야 한다. 이 나이가 되도록 일을 안 하면 손가락만 빨아야 하다니,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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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간간이 노후를 어떻게 지내야 할지 고민하고는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에겐 푸드뱅크가 있다구.”

 

사실 나의 노후에 대한 고민은 경제적인 것보다 지리적인 것이다. 과연 어디에서 삶을 마쳐야 할 것인가. 내가 죽고 나서 아내는 20년 이상 홀로 더 살 것이다. 나의 혈통과 다르게 아내의 집안이, 마치 엘프 종족처럼, 엄청나게 장수하는 혈통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내가 죽은 후 아내 혼자 캐나다에서 사는게 맞는 것인가? 더 늦기 전에 한국에서 자리를 잡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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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노후는 경제적인 것도 아니고 지리적인 것도 아니었다.

 

“밥하기 싫어. 나의 은퇴는 부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야.”

 

최근에 들은 아내의 충격적인 선언이다.

 

아내는 요리를 참 잘한다. 게다가 캐나다로 이사 오기 전에는 정부가 지원하는 학원에서 여러 요리 과정을 수강했다. 그래서 일식, 중식, 한식 등의 자격증까지 있다. 그런데 막상 아내는 부엌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나는 100% 아내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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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드라마 때문이다.

 

여러 달 전에 ‘나의 해방 일지’ 라는 드라마를 봤다. 재미있게 봤었던 ‘나의 아저씨’ 작가와 제작진이 만든 드라마다. 이것도 꽤 재밌게 봤다. 경기도 시골의 엄마, 아빠, 삼남매 가족과 한 명의 더부살이가 주인공이다. 이 드라마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먹방’ 이다. 출연진들이 엄청나게 먹어댄다. 여섯 명의 식구가 아침, 점심, 저녁으로 먹는다. 출연진들이 이걸 촬영하고 나서 몸무게가 불어났을 것임에 틀림없다.

 

드라마 막바지에 비극이 찾아온다. 매일같이 밥을 해 바쳐야 하는 신세를 한탄하던 엄마가 낮잠을 자다가 돌연사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갑자기 난관에 빠진 가족의 식탁을 묘사한다. 매일 같이 먹던 세끼 식사가 그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님을 드디어 온 가족이 깨닫게 된다.

 

막내딸은 반찬을 집어 먹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이미 상해 버린 음식을 뱉어낸다. 아버지는 서울로 출퇴근하는 아이들을 위해 생전 처음으로 식칼과 도마를 든다. 그리고 둘째 아들과 장녀도 각자의 방법으로 엄마의 부재를 견뎌내기 위해 애쓴다.

 

갑자기 세끼 밥상을 차리기 위한 노동과 고민이 엄청난 무게로 다가왔다. 아내가 부엌으로부터 탈출을 원하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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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잡글의 결론을 내야겠다.

 

올해 1월 중순에서 2월 중순 사이에 경기도 용인에 있었다. 숙소가 먹자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아침은 간단히 토스트로 때우고 점심과 저녁을 매일 같이 외식했다. 치킨, 순대국, 칼국수, 소머리국밥, 해물탕, 동태찌개, 짬뽕, 스시, 돼지갈비, 양평해장국, 소곱창 구이, 만두, 설렁탕, 도가니탕, 비빔밥, 오삼불고기 등등을 먹어댔다. 그런데도 그 먹자골목에 미처 방문하지 못한 식당이 천지삐까리다.

 

아내는 내가 죽고 혼자 오래 살아야 한다. 아내는 부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캐나다의 외식거리는 햄버거, 피자, 쌀국수 그리고 맛없는 스시 정도다. 게다가 가격 경쟁력도 형편없다.

 

아내의 웰빙을 위해 언젠간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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