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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믿는다 는 말의 모순 |
작성자 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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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7378 |
작성일 2014-06-30 08:01 |
조회수 2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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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전에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고 저의 개인적인 고백을 말씀드렸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나누어 주시고 질문도 하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을 지닌 기독교인이고 2년전에 은퇴하기까지 캐나다에서 20년동안 교회에서 일한 목사입니다. 메길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목회현장에서 저의 기독교 신학은 서서히 진화되었습니다. 과거의 패러다임은 서서히 물러가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저를 사로 잡았습니다. 저도 과거에는 초자연적이고 인격적인 하느님의 축복론과 예수의 이분법적인 구원론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하늘 위에 있는 형이상학적인 하느님과 교회가 만든 교리적인 예수는 사라지고 깨달음의 하느님과 참 인간 예수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요일 예배의 강단에서 그리고 성경공부반에서 교인들에게 하느님을 믿기 보다는 하느님을 스스로 느끼고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면 더욱 행복하고 의미있게 살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체험이고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해, 나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의 고백을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라고 요청했습니다.
은퇴한 후 요즈음 Religious Naturalism 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북미의 원주민들의 영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신론과 무신론의 논쟁은 무의미합니다. 하느님이냐 하나님이냐 한울님이냐의 논쟁도 무의미합니다. 하느님/하나님/한울님 은 믿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는 수단이고 표현입니다. 성서적으로도 God 이란 말은 고유명사의 이름이 아니라 영적체험을 표현하는 방법일뿐입니다. 따라서 성서에 God 에 대해서수 십가지의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지금도 역사적 예수가 체험하고 가르친 하느님과 세상과 인간과 생명에 대해서 탐구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만든 전지전능한 하느님과 최후 심판의 교리적인 예수에 대한 조직신학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대신 역사적 예수가 깨달은 하느님의 의미와 인간의 존엄성과 형이하학적인 삶을 신뢰합니다.
종교인의 신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 생명들과 자연과의 상호관계를 존중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고 생각해 보지도 못한 분들은 부디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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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목회자들이 판치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불신하는 요즈음..
이런 신선한 신앙고백을 접하니 무척 반갑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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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 안녕하세요. “고백”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딴지를 많이 걸어서 짜증나실지 모르겠지만, 이 게시판은 토론싸이트로 이해해서 댓글을 답니다. 저는 모태신앙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여기에 별 관심은 없습니다. 저는 고딩 때 교회에 첨 나갔었습니다. 그 전에는 종교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 하나, 제가 어릴때 병치레를 많이 한다고 저를 단골네에게 부모님이 파셔서 저에겐 어머니가 두분 계셨었습니다. 어느날 단골네가 우리집에 오셨는데, 제 친모께서 “어머니”니 절하라고 해서 당황했었습니다. 그 단골네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다면 그 인자한 미소짓던 모습을 다시 보고 진짜 “어머니”하고 큰 절을 올리고 싶습니다. 아마 제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도 저의 단골 어머니 무당께서 기도해 주신 덕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늘봄님의 새로운 글에 늘 도전을 받고 자극을 받지만 한편으로는 황당한 생각들도 많이 하게 됩니다.
가령, 이렇습니다. 늘봄님께서 신학을 하시고 목회를 하신 분이 형이상학적 postulation이 전혀 없고 형이하학적이시라고 하니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자연주의적 기초를 염두해 두셔서 그러신 것같은데요. 흔히 생각하는 바대로, 신학과 철학은 어떤 형태든 형이상학적 요소를 배제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보통, 인문사회과학은 형이상학적 진술을 배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문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역사학은 당연히 형이상학적 진술을 하지 않죠. 사회학이나 사회/문화인류학 등도 형이상학적 진술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있다면 그것은 가설과 이론, 그리고 반증의 연속이죠. 종교학도 경험학문이므로 철저히 형이상학적 진술을 배제합니다. 종교학자 니니안 스마트는 “방법론적 불가지론”(methodological agnosticism)이라고 하여, 신이니, 열반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은 검증할 수 없으니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고 정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학은 신이 존재하냐 하지 않느냐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신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진술이나 행동을 연구하는 것이죠. 종교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아예 “방법론적 무신론”(mythological atheism)이라는 말을 제시하긴 했지만, 무신론이란 말이 좀 무거워 인류학에서나 종교학에서 스마트의 방법론적 불가지론의 개념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늘봄님께서 “하느님을 믿는다 는 말의 모순”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늘봄님의 신학적 가치판단에 근거한 것입니다. 늘봄님처럼 유신론적 대상으로서의 신을 믿지 않는 분에게는 그것이 모순이 될지 모르겠지만,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종교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 어느 누구도 종교라는 정의를 내릴 때, “신”을 믿는 것과 그 신념체계를 종교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요즘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세계종교 개론서들을 보면, 원주민 종교나 신종교까지 총 망라하고 있습니다. 늘봄님 말씀대로 유신론과 무신론의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하셨는데, 정말 그런가여? 그럼 리챠드 도킨스 선생이 화가 나서 무신론을 들고 나왔나요? 이 세상에서 개인이든, 집단이든, 나름대로 우주론이나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땜에 무신론적 생물학자 도킨스 선생은 기독교 근본주의나 유대정통주의, 이슬람 근본주의에 화가 나서 God Delusion이라는 책을 쓰시고 세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그 책 promotion을 하셨잖아요. 이 세상은 다원사회이고 다양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피력하고 있고, 무신론, 유신론, 다신론, 불가지론 등은 그런 현상을 제대로 가늠하는데 필요한 개념적 도구입니다. Heuristic device없이 사물의 현상을 설명해 낼 수 없습니다.
늘 봄님께서 “종교인의 신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깨닫는 것입니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부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수십억 종교인들의 핵심은 깨달음이 아니라 devotion입니다. 어떤 형태든 무엇인가에 dedicate 한다는 것이죠. 전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른 생명들과 이웃과의 상호 관계를 존경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며칠전 제가 아내에게 농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에 저렇게 많은 힌두교도들이 소고기를 먹으면 얼마나 자연이 황폐화될까 말이죠. 아마 알버타 소고기를 인디언들이 다 싹쓸이 할 것같다고요. 그리고 무슬림들이 술을 마신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들은 포도주를 마실 기회가 드물꺼라는 것이고, 온 세계가 포도밭으로 가득차겠죠. 지금 중국인들이 세계의 포도주와 치즈를 엄청 소비하고 있듯이요. 어느 진보적 이념이 이 세상을 단번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늘봄님의 신학사상과 영성적 실천은 그 다양성의 하나임으로 존중되어야 하고 많은 사람들이 늘봄님의 글을 읽어 깨침을 많이 받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사족이지만, 유신론의 종말이 있는 곳에, 깨달음의 진리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신들이 그 자리를 대체해왔습니다. 인도는 깨달음의 나라가 아니라 신들의 나라입니다. 불교는 어떤가요? 대승불교는 깨달음의 불국토를 형성한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붇다와 보디사트바의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소승불교는 어떤가요? 깨달음의 나라가 아닌 주술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또 한가지 사족을 말씀드리면, 늘봄님의 기독교 교리 비판은 대부분 보수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이고, 교리 이해도 거기에 매몰되어 있다는 겁니다. 늘봄님은 “교회가 만든 전지전능한 하느님과 최후 심판의 교리적인 예수에 대한 조직신학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습니다.”고 하셨는데, 어떤 면에서 이것은 넌센스입니다. 보수복음주의자들의 교의론에 보면 의미있는 것이지만, 주류신학계에서 이런 강조를 하는 진보적인 학자들이 어디 있나요? 교리의 부정은 종교적 현실의 부정입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어떤 신념과 진술을 체계적으로 말하려면 조직적 사고가 필요하고, 그러한 조직적 진술을 틸리히는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라고 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는 dogmaics와 조직신학을 동일시하고 있는데, 틸리히가 바르트의 Church Dogmaitcs를 버리고 Systematic Theology라고 바꾼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언젠가 늘봄님께서 새로운 신앙의 선언문을 발표하셨는데, 그런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서 몇번 그런 강령을 발표하면 교리가 되는 것이죠.
마지막 첨언을 하자면, 종교는 진화를 하는데, 기독교의 경우, 성서라는 신화적 텍스트가 고정되어 있는 대신에 교리는 진화를 거듭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원시적인 예수 사상에 머물 수 없습니다. 예수는 너무 멀고, 우리는 너무 근대적입니다.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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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가 진화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자유주의적 신앙인들의 주장일 뿐일 것입니다. 교리나 신학으로 정리된 기독교의 믿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 결국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기독교인이라 규정해야합니다. 유대교적 비전에서 유래된 그리스도 (christ)를 따르고 믿는 예수의 제자들이 바로 기독교 인 (christian)이라 불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때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하시고 또 제자들이 교회 구성원들에게 그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먼곳에 그리스도 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서면으로 정리한 그 내용 그리고 교회 구성원들에게 전한 그 가르침을 기초로 기독교의 사상과 신학은 형성되어졌고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정통한 신학으로 여기는 것이 오래되었다고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리한것을 기독교의 신학으로 정의하는 것이 정당한것이 아닐까요? (Christian theology) 시간이 지나며 그 서면의 텍스트에 대한 진위성 논란 그리고 그것의 해석에 대한 논란과 현세의 삶에 그 내용을 어떻게 적용하냐 등등의 이유로 많은 이들이 자신만의 다른 이론들을 내놓고 어느덧 교회는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이 진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독교의 신학이 진화를 거듭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목사나 신학자가 되어서 자신의 이론을 가르치는 이들은 현실적으로는 기독교인 (christian =disciples of christ)임을 거부한것이고 그들이 말하는 믿음은 사실 기독교의 신앙과 별 관계 없는, 자기의 신학이나 기독교의 신학과 비슷한 가르침을 전하는 것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할것입니다. 제가 경험하고 살아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시적이지 않습니다. 근대적인 사람들도 참된 가르침을 받으면 그 원시적인 사상으로 세상을 사랑과 빛으로 채울수 있다고 전 믿습니다. 그리고 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면서 살아가는 능력과 태도와 삶을 기독교적인 영성이라고 합니다. 믿는 이들은 혼동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인이 아닌이들이 너무나 많이 기독교(Christian)인 흉내를 내고 살아갑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르던 안따르던 믿던 안믿던 별로 상관 안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격적으로 존중되어야 하는 사회 구성원인것도 믿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기독교인 척하며 신학을 논하고 믿음에 대해 논하는 것은 반대하기에 이렇게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전 기독교 인 즉 예수님의 원시적인 가르침만을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솔직히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게는 시대를 초월하는 초 현실적 가르침이라고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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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Gil님, 안녕하세요. 포스트를 늘봄님께서 올리셨는데, 아래도 그렇고 저만 설치는 것같아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종교은 특정 시기와 공간에서 발생했고, 기독교 역시 로마의 식민지 상황인 팔레스틴과 로마의 다문화가정인 바울에 의해 형성된 역사적 문화적 종교입니다. 제가 성서라는 텍스트가 고정되었다는 것은 예수 사후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의 산물이 복음서와 편지글, 그리고 그들의 행위의 기록(행전; 한국성서는 사도행전이라고 번역됨)에 한정되었다는 의미고요. 그러니까 신약성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의 기록이며, 그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계시라고 하면 할말이 없지만 제가 볼 때, 신약성서에는 초자연적 계시라는 맥락이 단 한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 경험과 기억의 기록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러니 종교 경전으로보면 어쩌면 많이 낡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대문헌에는 시대가 요구하는 답변을 모두 담고 있지 못합니다. 종교경험의 기록이 어떻게 사회, 문화, 정치, 경제, 과학 등등을 다 담고 있겠습니까?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질문과 도전에 답변을 한 것이 신학이고 교리입니다. 제가 원시적이라는 것은 당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종교적 경험이 원시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험은 당시의 문화적 지리적 사회적 제약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경우, 성서가 정경화(canonization) 되면서 이른바 종교경험의 문서(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거룩한 경전)는 고정되었고 더 이상의 경험의 문서는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딜레마죠. 그래서 발전된 것이 주석학과 해석학, 그리고 이러한 주석학과 해석학의 결과물에 기초해서 발전된 것이 교의학입니다. 님께서는 교리의 “진화”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은 것같은데, 이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뭐, 진화대신에 발전이나 체계화 등등의 대안적 개념을 사용할 수 있겠죠. 사실 기독교 복음주의니 근본주의니 하는 것도 세계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 것입니다.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신학을 정통이라고 강변하지만, 사실 보수복음주의는 진화론이나 근대과학의 반발, 즉 종교적 반동운동(counter-movements)의 결과입니다. 성서영감론이니 하는 것도 칼빈이나 루터가 다룬 것이지만, 현대성서비평의 발달로 인해 보수근본주의자들의 반작용으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종교는 어떤 형태든 변하는데, 앞으로의 기독교는 어떻게 가야할지 고민되는 부분입니다. 저는 기독교의 발전사를 보면서 종교경전이 고정된 상태에 있었는데, 지금까지 생존해 온 이유를 주목하였고, 그 이유가 바로 교리의 진화라는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불교의 경우 수많은 소이경전이 나왔고, 유대교의 경우 히브리 성서뿐 아니라 탈무드 등을 정리한 Gemara등이 있어서 현대사회에서 제대로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반동적 근본주의는 바로 고정된 성서 텍스트에가 교리마저 반동적인 형태를 보인 것이구요. 몰몬교는 계속적 계시를 인정하므로써 지금도 그들의 교리는 공식적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성서텍스트의 고정화와 교리의 진화는 누가 쓴 말은 아니고 제가 지어낸 말이구요. 즉 종교의 진화형태에서 기독교의 정경화의 난제를 극복하려는 기독교 나름의 몸부림이 바로 교리의 진화라는 것이죠.
David Gil님 훌륭한 문제제기 감사하구요. 따로 한 장을 올리셔서 님의 입장을 개진하셔도 좋을듯합니다. 대화는 어떤 형태로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아프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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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분영히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의 삶을 관찰하거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꿈이나 비전을 통해서 본 바울과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그분이 전해주신 육안으로 보이는 세상에서의 그분이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것 뿐아니라, 우리가 볼수 없는 천사나 하나니의 존재 그리고 인류가 죽은 후에 그 다음의 삶에 대한 가르침을 적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의심했지만 후에 보았다는 예수님의 부활과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가 여지껏 성장하기까지는 한 회사가 생존하기 위해서 계속 혁신을 해야하듯이 물론 역사적으로 많은 변화를 추구하고 많은 사건들을 격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교회는 한때는 타락하기도 했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개혁자들의 노력으로 종교전쟁등의 여러가지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루터와 종교전쟁을 통해 대중에게 성경이 쉽게 접해질수 있었던 계기도 있었고, 그리고 성서 비평의 발달 등으로 인해 교회가 얻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사람들의 취향과 그때 그때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교회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한예로 갈릴레오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했을때, 교회의 지도자 들은 그들의 우둔함으로 인해서 그 과학적인 진리를 배척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이 모든것을 다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 속에 있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문자 뒤에 있는 삶의 지침이나, 믿음의 원리들은 어떤 세상에서도 적용되어 질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삶의 지침은 초기 교회의 사람들이 고아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기반이 되었고, 지금도 기독교인들이 봉사의 삶을 살아가는 기본 원리로 적용되어집니다. 이천년이 지나고 만년이 지나도 항상 적용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가르침, 외계인이 나타난다고 해도 외계인조차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부정할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세상에 존재하는 우리가 여지껏 발견하지 못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외계인에 대한 언급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 생각엔 외계인의 존재등등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도 부정할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생존의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받혀서 죽어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본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었습니다. 이러한 교리는 진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기반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자 성경은 제자들은 다 흩어져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다른이들이 이야기를 해도 믿지 못하고 의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하심을 보았고 그래서 교회가 그때 생존해서 그 가름침을 받은 이들이 로마시대에 사자에 물려죽으면서도 찬양하고 그 명맥을 유지하여 지금 가지 오는 것입니다. 제가 교리의 진화라는 말에 반감을 가진이유는 삼위일체라는 교리도 진화를 한다는 한 목사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의 부활 등등에 관한 근본적인 교리나 신앙이 변질된다면 더이상 그때는 교회가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사랑의 원리를 시대나 그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 것과는 다른것입니다. 짦은 글로 아프리카 님의 생각을 다 읽을 수 없습니다. 전 그냥 신앙인으로서 신앙인들에게 남기고 싶은 제 나누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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