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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장로에게 보낸 이메일
작성자 내사랑아프리카     게시물번호 7379 작성일 2014-07-01 19:52 조회수 3375
아래 글은 2012년 6월 6일 제가 어느 교회 장로께 보낸 이메일이고, 사적인 부분은 뺐습니다. 이 분은 상당히 진보적인 분이고 새로운 신학적 경향을 잘 수용하시는 분입니다. 이 게시판에 종교적인 글을 올려도 될 지 모르겠지만, 아래 글은 신학적 내용을 담기 보다는 문화의 일부로서 "종교적 현상"에 대한 저의 주관적 평가입니다. 아래 글에서 저는 새로운 기독교 경전이 나오길 기대했는데, 어느 학자가 편집해서 책을 하나 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2탄으로 미루겠습니다. 아래 늘봄님의 포스트에 David Gil님의 글에 대한 더 자세한 답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혹시 잘 못 들어오신 분은 이크 하고 무시하시고 너그럽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프리카 올림 


*** 장로님 안녕하세요. 
 
어느 잡지에 올린 장로님의 기고문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로님의 첨부글에 요한복음이 이제  evolutional process와 revised edition이필요하단 말을 보면서 제가 평소에 생각하는 생각을 적어 보겠습니다. 장로님께서 신학 또는 종교의 진화의 중요한 문제를 언급하셨고 앞으로도 계속 논의가 되어야 생각하기에 물꼬의 일부를 터볼까 생각합니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역사적 실재가 아니라 인간적 경험을 신화론적으로 진술한 것으로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물의 시원을 성서는 신화론적으로 표현했고, 우리는 그러한 신화론적 이야기를 과학적 진화론으로 읽기 보다는 독창적인 상상력의 틀에서 봐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장로님의 말씀은 기독교인이시니까 인류의 일반적 기원을 성서 이야기를 유비시켜 말씀하신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의 경우, 일반적으로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인 진화로 구분하는 것같은데, 문화적 진화에 생물학적 진화를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종교의 진화론적 시각은 옛날,  종교학의 비조 막스 뮐러 ( Max Muller; 1823 – 1900)가 시도했었고, 에드워드 타일러 (Edward Tylor 1832-1917)라는 인류학자가 종교는 animism=>polytheism=>monotheism으로 진화발전된다는 주장을 했으며, 제임스 프레이저(Sir. James Frazer)는 종교는 주술(magic)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중반 구조/기능주의 연구자들이 종교적 진화론적 발전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종교의 진화론적 이해는 학자들의 관심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초창기 학자들이 진화론적 시각을 갖게 된 것은 종교의 기원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진화의 처음을 추적하면 종교의 기원을 알 수 있으리라는 가설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종교의 기원에 대해서 속시원한 답을 못주자 이렇게 종교의 기원을 묻는 질문들은 인기를 잃게 되었었습니다. 그러다가 진화론은 최근에 동물학, 생물학, 심리학의 연구 업적에 의하여 점차적으로 인문학으로 인기의 폭을 넓히고 있는 것같습니다.  

종교가 다신론에서 일신론으로 자원스럽게 발전되었다는 것은 에드워드 타일러의 입장이었는데 이탈리아의 종교사학자인 페타쪼니는 혁명적인 과정을 통해서 일신론이 정착되었다고 주장하고, 이것은 구조주의 인류학자 에반스-프리챠드(Evans-Pritchard)에 의해 지지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그의 책 [Theories of Primitive Religion]의 20-47 쪽에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신론에서 일신론으로의 발전이 혁명에 의해서냐 진화에 의해서냐의 문제였습니다. 페타쪼니와 에반스-프리챠드는 전자이고 최근에 종교를 진화론적으로 보는 이들은 후자의 입장을 주로 견지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가톨릭 제수잇이었던 떼이야르 드 샤뎅(Teilhard de Chardin)이 진화론적 신학을 전개하기는 했지만, 그의 입장은 지나치게 신학적입니다. 종교사회학에서는 지난 저의 편지글에서 언급한 로버트 벨라 (Robert Bellah)라는 학자 등이 진화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드 샤댕의 경우는 그가 북경원인 발견의 사기(fraud)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그의 신학에 대한 평가를 망설이고 있습니다.  인문사회과학의 경우 그 동안 진화론은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의 뼈아픈 과거가 있어서 여전히 조심스러운 것같습니다. 사회진화론의 경우, 러시아 귀화인인 박노자는 그의 [우승열패의 신화]에서 한국에서의 상황을 고려해서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현재 종교에 대한 진화론적 입장은 도덕성의 견지에서 부족주의->형제주의->이타주의 등으로의 발전을 전개하고 있는데 여전히 질문을 던져야 할 부분이 많은 것같습니다. 저는 신학에서의 진화는 현재로선 진화론적이라기 보다는 신학적 진술이나 주장의 세련화의 과정 (the process of refinement)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름대로 과학적 발견물을 신학적 통찰에 적용하려는 사람은 드 샤댕이지만, 샤댕은 진화론적 과학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론적 상상력 또는 통찰을 신학에 적용할 뿐입니다. 

기독교에서의 진화론의 문제는 진화론의 적용의 문제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학이야 상황과의 대화를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니까 발전될 수 밖에 없지만 성서는 여전히 2천년 전의 고문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크스 보그(Marcus Borg)가 아무리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지 말고 은유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언어는 일차적으로 denotation에서 출발합니다. connotation으로 가려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불트만이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성서적 우주론은 하늘, 땅, 지하라는 삼층적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책을 쓴 사람들이 바로 그런 우주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성서의 삼층적 세계는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이렇게 삼층적 구조에 기초한 성서적 이야기나 진술은 우리가 아무리 진보적인 해석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우주론과 현대적 우주론의 양립불가능성이나 양립의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두 개의 대조되는 우주론에서 새로운 성서적 해석이나 신학적 해석을 한다해도 지나치면 억지 해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보신학계열에서 성서를 proof-texting으로 읽지 말자고 하더라도, 이 방법을 완전히 극복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가 물위를 걷는 장면을 본문으로 잡아 설교를 할 경우, 진보적인 해석은 내용적 차이는 있겠지만, 방법적으로 보수적인 알레고리적 해석과 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현대 신학은 고대 원시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역사인데, 66권이라는 성스 텍스트의 고정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님께서 "If John were here with us today, I wonder whether he would consider some comments to add to his Gospel and even write a revised edition." 하신 것은 고대 문서로서의 성서적 한계 또한 제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고대의 우주론이 disapproved된 현 시점에서도 어느 기독교 교단에서도 66권을 재편집하자는 논의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도마 복음서를 성서에 넣느냐 하는 문제도 포함된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성서와 현대적 상황의 엇박자는 새로운 신학적 성찰을 낳았습니다. 불트만의 탈신화화론이나 실존론적 해석, 1960년대에 일어난 세속화신학이나 신의 죽음의 신학, 그리고 최근에 존 스퐁(John Shelby  Spong)과 그의 신학적 동지인 연합교회 목사 그레타 바스퍼 (Gretta Vosper)의 유신론의 종말 선언은 진보적 신학의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작년 어느 모임에 갔는데,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던 분이 자기는 Christian atheist라고 하더군요. 이것은 그가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유신론(theism)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모임을 인도하는 강사도 그 주장에 동의한다고 하면서 전통적인 유신론의 종말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신관이 나왔나요? 이것이 바로 진보적인 신학의 딜레마입니다. 성서는 2-3천년 전의 고문서이고 신학은 현대물리학을 이야기합니다. 제 짧은 지식으로 단언컨대, 성서적 신관은 유신론적 신관입니다. 이러한 유신론적 신관의 발전적인 형태인 panentheism(범재신론)도 있긴 하지만, 이것은 유신론의 세련된 발전 또는 정교화지 유신론의 전적인 부정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는 스퐁의 신학에서 저는 전통적인 "신화의 죽음"(the death of myth)을 봅니다. 문제는 전통적인 신화의 죽음을 보지만, 새로운 신화의 탄생은 아직은 이른 상태입니다. 우리는 post-Spong 또는 post-Vosper, 즉 스퐁과 바스퍼 이후, 유신론의 종말을 딛고 나온 새로운 신화의 탄생을 아직 못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신화없는 현대 교회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막간을 이용해 도대체 신화가 무엇인지 약간 설명을 하겠습니다. 신화는 이야기적 형식으로 쓰여져 있고, 이야기는 수많은 은유의 집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은유적 혁신이 일어난다고 신화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은유를 사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이야기, 즉 신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 신화의 고정화를 우리는 상징이라고 합니다. 상징은 은유의 고정화를 통해서 이뤄집니다. 즉  이야기가 그냥 전설이나 소문이 아니라, 내 삶에서 진실하고 참되려면 (true and authentic) 신화로 경험되어야 합니다. 신화란 바로 내가 그것을 진실하고 참되다고 믿어야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셉 캠벨이 이야기한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입니다. 그런데 진보적 교회는 이것이 아주 부분적으로 경험되거나 파편적으로 경험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진보적 신학운동의 급진적인 귀결은 유신론의 종말로 갈 수 밖에 없고, 거기에서 성서의 기능도 끝나고 맙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진보적인 신학에서 볼 때, 현재 기독교 성서는  더이상 우리에게 새로운 신관을 제시해 주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화론적 진술로서의 성서는 점점 막을 내리고, 그 신화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도 통합력을 상실합니다.  

여기에 신화의 죽음, 신화공동체의 죽음이 예상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거름삼아 새로운 신화의 탄생을 예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신화의 탄생은 기독교의 부흥이 아니라 기독교의 종말의 자리, 즉 진보적 교회의 무덤위에서 이뤄질 것이라는 것이 저의 예상입니다. 이렇게 볼 때, 새로운 신화의 탄생은 기독교의 재생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의 탄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성서는 revised 조차 되지 않았으니까요. 아주 보수적인 몰몬교는 계시의 계속성을 주장하면서 자기들의 신화적 내용을 계속 수정해 나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기독교 내에서 진보적인 교회는 진보적인 신학을 이야기 하지만, 성서의 진화나 수정은 제가 알고 있는 한 어느 누구도 제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기는 진보 신학에 회오리바람을 몰고 올 것입니다. 기존의 성서가 탈신화된 현대에서, 신학의 진보만이 아니라 성서의 진보도 병행되어야 우리는 새로운 신화속에 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신학의 진보만 있고, 성서는 고정된 불변의 텍스트로 남는다면, 은유적 혁신이나 신화의 탄생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스퐁이나 바스퍼의 주장이 신화의 재탄생으로 나타나려면 "성서의 진화"와 "신학의 진화"는 같이 가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유신론의 종말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신학적 급진주의만 난무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스퐁이나 바스퍼의 주장은 새로움(novelty)이 아니라 60년대 신의죽음의 신학의 신선한 재탕 정도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스퐁과 바스퍼는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에 점점 솔직해지고 있지만요. 

이상이 바로 제가 바라보는 진보신학에 대한 평가이며, 진보교회의 신화의 파편화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66권의 성서에 사는 한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일종의 영성적 분열 또는 신화적 파편(mythic fragments)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religiosity 대신에 spirituality란 말을 선호하는 것은 이제 성서 전체가 우리의 세계관을 통합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부분적 기능만을 한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진보교회내에서 spiritual gifts나 healing touch 등의 개념이  currency를 얻은 것은 바로 전통적인 신화의 종말 이후 파편화된 신화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진단을 해 봅니다. 

J.A.T Robinson이 [Honest to God]를 썼고, Robert Funk가 [Honest to Jesus]라는 책을 썼는데, 성서 학자라면 이제  [Honest to the Bible]이란 책을 쓰야 할 것 같습니다. 옛날 민중신학자 서남동 선생께서 성서는 우리 신앙의 교과서(textbooks)라고 하셨었는데, 이 교과서가 66권으로 제한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교과서가 기능을 상실한다면 다른 교과서를 채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 전통적인 성서 교과서에 우리가 머물고 있는 한 진보적 신학은 대중화되지 못한 유행으로 끝나고 앞으로도 비슷한 형태의 급진적인 신학운동으로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은유적 혁신(metaphorical innovation)은 해석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리 실제로 은유가 새롭게 다시 만들어져야 합니다. 성서는 은유적 혁신이라는 차원에서 이미 cliche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불트만은 정직한 학자였지만 교회 내의 신학자였습니다.

후기: 
신화의 탄생 (The Birth of Myth)인간의 운명처럼, 신화는 태어나서 죽거나 완전히 새로 태어난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이 없듯이 신화는 다른 옷을 입고 재탄생하거나 새로운 혁신을 통해서 나타난다.  신화의 기본이 이야기에 기반한다면종교는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면서  "새로운 신화공동체"(a new mythic community)를 형성한다그러므로  "신화를 산다"(We live by myths)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종교의 세속화는 종교의 소멸이 아니라 다른 종교로 대체될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이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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