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쇠락과 상승, 갈무리 _ 청야 김민식 (한국문인협회, 캘거리)
달랑 살던 집 한 채 판 돈으로 이것 저것 빛을 갚고 가구 몇 점 사서 수화물 이민 컨테이너에 서둘러 실어 보냈다.
이민 통장에 남은 돈이 쌈짓돈 같아 불안한 나날이 지나가더니 캘거리 공항에 도착하는 날부터 신경이 곤두섰다. 다섯 가정이 한 비행기로 캘거리 공항에 내리자 교민 봉사차량 10여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윤지원 담임목사를 필두로 침례교회 교인들, 기수별로 먼저 도착한 가정들과 반갑게 조우했다. 세 가정은 일주일내내 미리 마련한 우리집 타운하우스 좁은 방에서 함께 지냈던 추억이 새롭다.
그 시절 이민 정보가 부족한 탓에 이민 대행 회사에서 만난 이민 가정들이 모임을 결성했다. 한때는 100가정이 넘어 몇 개월 동안 시청 인근 상공회의소 뷔페식당에서 몇 차례 모임을 가졌고 기업이민 자격으로 한 가정당 20만불씩 공탁하던 조건이어서 두 은행이 치열하게 모임 경비지원을 했다. ‘아리랑회’ - 내가 총무를 맡았고 기수별로 이민수속 허가가 나오는 즉시 서둘러 벤쿠버, 캘거리 등지로 출국했다. 우리 일행이 거의 마지막 모임이었다.
총무 인연으로 시간이 나면 공항으로 뻔질나게 나가서 그간 사귀었던 이민가정 환송을 하던 옛 추억, 기쁨은 커녕 눈물로 이별을 고하는 가정들이 많은 시절이었다.
나의 면접일정이 몇 차례 연기되더니 캐나다 대사관에서 영사면접이 있었다. 이민 담당 영사가 심한 기침을 하며, 내 얼굴에 침이 튀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는데 모른 척 계속 딱딱한 질문만 연신 퍼부었다.
면접이 끝날 무렵 정중하게 한마디 건낸 것이 화근이었다. “내 얼굴에 기침이 튀어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는데 불쾌합니다.”1년이 넘도록 이민 허가 통보가 없어 이민회사에 문의를 했더니 담당 영사가 내가 근무하는 동안에는 나의 이민 허가는 불가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곧이어 총영사 특별 재 면접 통보가 왔다.
월례모임에 내가 총무 진행으로 칭찬을 받았던 낯이 익은 총영사였다. 총영사사무실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더니 두툼한 서류는 본체만체 빨리 캘거리로 출국하라고 했다. 총무 일을 하던 그 능력으로 중국인 이민자들 처럼 공동으로 상가 건물을 구입하면 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하며 서둘러 나를 밀듯이 내 보냈다.
그리고 33년이 훌쩍 지났다.
그 시절의 궁핍한 긴장이 늘 습관처럼 자신을 추스리며 한 곳에서 피자 레스토랑을 33년 이어오고 있는 중이다.
처음 몇 년 동안은 명절이나 중요 공휴일 너댓세는 문을 닫았으나. 그 이후로 폭설이나 건물 화재로 정전 등 재해 사고 몇 번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하루만 쉬고 식당 문을 열고 있다.
그 동안 치질, 축농증, 담낭수술을 하고 5년마다 한번씩 시행하는 위 내시경 수술도 다섯번이나 견디어 냈다.
후유증으로 육체는 점점 쇠락의 길로 접어 들었다.
20여년 전 쯤인가, 어머니와 형제 등이 세상을 떠나자, 장남인 나는 심한 우울 증으로 몇 해 동안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도 식당일은 계속했다. 한의사들은 과로로 목, 어깨, 허리 통증 등 전신통증으로 피가 탁해서 몇 년 삶을 지탱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위기를 당한 여자 유학생 가정을 돌보아주었다. 그 어머니가 나의 얼굴을 살피더니 서울의 남편 한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캘거리공항에서 바로 가게로 도착했다. 침으로 막힌 혈을 치료하고 심하게 노화된 근육을 치료했다. 바로 이튿날 출국하면서 공항에서 세심하게 주의사항을 반복해서 일러준다. 서울 방문길에 들렀더니 대형 한방병원 원장으로 바쁜 진료일정을 확인하고는 전화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타자를 위해 헌신하는 봉사, 치유를 위한 지름길이다.
4 년전, 지금도 30년을 계속적으로 보살피던 패미리 닥터가 갑자기 호출했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 동안 나의 진료 기록을 깨알같이 외우고 있어 웬만한 치료는 면접 대신에 전화로 소통했다. 진료실로 갔더니 느닷없이 며느리가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 며느리를 태우고 운전했는데 동작이 어눌하다고 고자질을 한 것이다. 30여분간 정밀 검사를 받았다.
모든 육체적 기능이 점점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 같은 비통한 신체를 한탄할 겨를도 없이 반기를 들었다.
이루다 글로 표현할 수 없는 파란만장한 이민생활. 극복해야만 한다.
스스로 ‘노년의 역주행’을 선언하고 고된 훈련을 시작했다. 죽기살기로 결행했다. 이러나 저러나 죽는 길은 한 길 지평선이다.
<누 죽 걸 산> -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 스스로 구호를 정하고 그렌모어 저수지 길을 걷기 시작했다.
40분 동안 매일 같은 길을 걷는다. 숨이 차고 힘이 들어도 매일 계속 걷는다. 지루해지기 시작하자 이어폰을 끼고 행진곡에 발 맞주며 걷는다. 익숙해지자 걸음이 빨라진다. 자연은 매일 나에게 다름을 보여준다.
이제는 계절을 읽기 시작하고 눈, 비, 바람들이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들, 춤추는 모습들을 듣고 볼 수 있는 능력이 날로 상승한다. 다름을 관조하는 능력이 상승하는 즐거움. 철새 코요테 보리수나무 엉컹퀴 민들레도 나와 서로 관조하며 속삭인다. 호수의 벤치, 파도소리. 먹구름이 밀려오는 소리들이 음의 향기를 품으며 맛과 멋을 풍긴다.
이제는 절반은 저 강도 달리기로, 일년에 몇 차례 넘실대는 영하 30도, 영상 30도의 혹한과 폭염도 견디며 걷는 것은 죽음을 늘 염두에 둔, 나의 그림자를 사랑하며 나 스스로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육체적 쇠락을 지연시키고 정신의 심화를 즐기는 기쁨도 잠시인가. 망구(望九)의 언저리. 지나온 쇠락과 상승들, 삶의 파편들을 모아서 문장을 쓰는 노년의 갈무리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