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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문맹퇴치 4] 성서는 믿으면 축복받고 천국가는 교리책이나 도덕책이 아니다!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11409 작성일 2018-12-02 06:03 조회수 3521

많은 기독교 평신도들은 성서와 역사적 예수와 예수의 하느님에 대해 대단히 잘못된 교리적 믿음으로 세뇌되었다. 성서는 문자적으로 믿고, 많이 읽고, 암송하고, 몸에 지니고 다니면 기적이 일어나는 마술책이 아니다. 물론 성서는 도덕책, 과학책, 역사책, 교리책도 아니다. 원초적인 성서의 핵심 메시지는 현대어로 말하자면 진화적인 신앙과 지혜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에 대한 것이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삶의 모습에서 그 길을 깨달아 알고, 예수를 자신들의 삶의 길잡이라고 고백했다. 예수의 우주적인 하느님은 성전종교의 심판하는 하느님과는 너무 달랐으며, 무엇보다도 예수는 이분법적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참 인간됨의 모범이었다. 성서는 고대에 기록되었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새로운 시대에 적절한 현세적인 책이다. 성서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이분법적인 교리에 대한 책이 아니다. 특히 신약성서는 참 인간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살았던 그의 우주적인 정신을 따라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책이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경전이 언제, 누가, 어떻게, 왜 기록했는지에 대해 바르게 알아야 한다. 특히 21세기 우주진화 세계관의 교육이 초등학교에서부터 보편화된 과학시대에 성서의 의미가 무엇인지 솔직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믿는 예수처럼 참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다. 종교는 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것이듯이, 성서는 하늘 위에 있는 신의 작품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의 작품이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성서비평학에 따르면 신구약 성서는 2천 년에서 3천 년 전 지구가 평평하고, 상층에 신들이 살고, 하층에 악마들이 산다고 상상했던 삼층 세계관적 고대 사회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환경에서 기록되었다. 다시 말해, 고대 성서는 인류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들의 다양한 모습의 삶으로부터 출현한 인간들의 체험적인 기록이며, 원초적으로 하느님을 교리적으로 믿는 것에 대한 책이 아니다. 다만 성서는 인간이 어떻게 온전하게 의미있게 행복하게 사느냐에 대한 책이다.

 

기독교의 신구약 성서 66권은 기원전 9세기와 서기 1세기 사이에 각자 다른 시대와 다양한 지역에서 40여명의 저자들이 기록했다. 고대인들은 1천년의 인류 역사 속에서 세계와 생명과 인간의 심층적인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기록했으며 이것들이 후대에 성서가 되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서는 한 시대의 한 사람이 기록한 단행본이 아니라, 여러 시대의 여러 저자들의 모음집이며, 인간들의 작품이다. 특히 성서의 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오늘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신약성서는 1세기경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사본들 중에 지극히 일부를 수집하고 편집한 책이다. 즉 오늘의 성서는 원초적인 저자의 작품이 아니며,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성서 저자들은 엄밀히 말해서 사본들의 수집가이며 필사가이며 편집자이다. 그들은 수집과 필사와 편집 과정에서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를 첨가하여 오늘의 성서를 만들었다. 오늘의 성서가 만들어질 당시에 수없이 많은 사본들이 읽여지고 있었으며, 수많은 필사가들이 멋대로 사본을 만들었기 때문에 어느 필사가는 자신의 사본이 가장 권위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을 창작했다. 성서는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하느님이 불러주는대로 받아쓴 책이 아니며, 인간이 스스로 체험한 하느님의 의미를 자신의 표현방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 문자적인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며, 하느님을 체험한 인간의 고백이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에 하나인 예레미야서는 경고하기를 하느님의 말씀은 돌판에 새겨진 문자가 아니라고 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말씀은 성경책이 아니라, 삼라만상으로부터 가슴과 머리로 깨달아 아는 하느님의 뜻 즉 공정한 정의-사심없는 사랑-시기와 멸시와 천대가 없는 평화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믿는 교리가 아니라, 사는 방식이다.

 

어원적으로 종교(Religion)라는 말의 의미는 신의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관계(Relation)에 대한 것이다. 다만 신(god)은 인간의 온전한 삶을 위한 궁극적인 수단 또는 종교적 요청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종교들의 경전은 하느님에 대해 믿지 못할 것을 억지로라도 믿어야 하는 교리책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온전하고 자유하고 행복한 삶이 되는지에 대한 지혜서이다. 특별히 21세기 현대인들에게 죽음 후 내세에 대한 책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세에 대한 책이다. 또한 고대의 종교적 경전들은 현대인들을 위해 문자적으로 기록한 역사책과 과학책이 아니다. 고대인들은 자연과 인간과 세계로부터 체험한 궁극적인 진리를 인간의 제한적인 언어로 기록하는 데 필연적으로 은유와 신화와 시를 사용했다. 따라서 우주진화 세계관의 현대인들이 고대 경전을 읽을 때 문자적으로 직역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경전은 은유적으로 시적으로 신화적으로 읽어야 한다. 이것은 종교인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이다. 

 

오늘 고대 경전을 우주진화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은유적으로 읽는 한 가지 예로 기독교 신약성서에 기록된 예수와 나병환자의 대화를 소개한다: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로 와서...’선생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간청하였다. . .” (마가복음서 1:40-45 표준새번역) 성서에 기록된 모든 이적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이 대화는 단순히 불치병이 치유되는 기적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은 끊임없이 변형하고 발전해야 하는 진화적 신앙과 삶에 대한 도전이다.

 

진화론을 발표한 챨스 다윈은 자신의 저서 <종의 기원>의 결론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온갖 종류의 식물들이 엉클어져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강뚝은 매우 흥미로웠다. 새들이 덤불 속에서 지저귀고, 온갖 곤충들과 지렁이들이 기어다니고 있으며, 서로 서로 다른 형태의 생물들이 상호 의존하면서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 주위에 어떤 법칙들이 있다. 넓은 의미에서 이 법칙들이란, 새로운 탄생으로의 발전이고, 끊임없는 재창조의 유산이며; 생명들의 환경에 따른 변화이며, 생명이 생존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다. 결과적으로 생명은 자연적으로 생존의 선택을 통하여 변화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되거나 소멸한다. 기근과 죽음과 자연과의 투쟁을 통해서 보다 나은 동물들로 변화된다. 태초로부터 여러가지 형태의 생명들이 출현한 것은 장엄한 일이다. 한편 지구는 중력의 법칙을 따라 순환하면서, 생명은 단순한 형태에서 시작하여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형태로 변화하며 진화해왔다.”

 

신약성서 마가복음서의 본문과 다윈의 말은 매우 대조적이다. 기독교 성서는 1세기 무렵 로마제국의 혹독한 탄압과 착취의 제국주의 시대에 사람들의 입을 통해 백여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던 신앙전승들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기록된 것이고, 다윈의 진화론은 19세기 자연과학 시대로부터 나온 과학적인 기록이다. 이 두 기록은 모두 21세기 현대 종교인들의 사고방식에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들이다.

 

1세기에 성서가 기록될 당시 사회와 종교계에서는 문둥병에 걸리는 원인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늘 위에 있는 하느님이 징벌을 내린 것이라고 철저하게 믿었다. 문둥병은 발진, 종기, 습진, 피부염 등 다양한 증세를 나타내는 불치병이었다. 따라서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더로운 낙인이 찍혔다. 심지어 이런 사람과 가까이 있어도 내가 더러워지기 때문에 매우 경계해야 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라도 더러워지면 종교체계가 설정한 하느님의 기준을 어기는 것이었다. 고대 사회에서 문둥병에 일단 걸리면 사회적 종교적 신분이 회복될 기회는 전혀 없었다. 모든 환자들은 평생 사회와 종교로부터 버림받고 분리되어 살아야 했다.

 

고대 사회에서는 물론 오늘의 보수적인 교회에서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건강함과 거룩함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사람들이 어떤 질병에 걸리면 부정하고 죄를 지은 것이고 동시에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예수 당시에 보편적이었으며 종교와 사회를 지배하던  가치관이었다. 또한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러한 이분법적 믿음 내지는 가치관에 세뇌되어 잘 길들여지고 단련되었다. 예를 들자면, 문둥병 환자 이야기 이외에 마가복음서 첫 부분에 예수가 악령에 사로잡힌 소위 부정한 사람들과 대면하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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