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의 긴급한 상황에서 중보교회들은 여전히 일요일 예배와 각종 집회를 갖는 무식한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또한 보수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경력을 위해 경제 활성화에 눈이 어두워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하는 규제조치를 완화하려는 무지하고 추악한 생각에 골몰하고 있다. 지난 수개월 동안 감염병 예방 의학자들은 경고하기를 바이러스 팬데믹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사회적 거리를 강화하고, 감염 검사를 확장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국민 전체의 생명과 건강과 안전을 위한 지극히 상식적인 지혜이다. 그러나 교회들은 무엇을 위해 무모하게 예배모임을 고집하는가? 불행하게도 내세지향적인 중보교회들이 예배모임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세계에서의 삶은 죄악스러운 것으로 치부하고 또한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하찮게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를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죽은 후에 보상으로 천국에 올라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헛된 망상때문이다.
오늘날 77억이 살고 있는 지구촌에서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기독교의 무지함과 무식함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당한체 불필요한 두려움과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사람답지 못하게 살고 있다. 비인간적인 불의에 대해 많은 원인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은 중보교회들의 삼층 세계관에 근거한 이분법적 신학과 성서근본주의 믿음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창조론과 죽음 후의 내세론과 이분법적 구원론이 초래하는 빈부차별, 성차별, 인종차별, 성적본능차별, 종교차별이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존엄성과 자유와 희망과 권리를 박탈한다. 삼층 세계관의 믿음체계는 인간의 본성, 생명의 존엄성, 그리고 세계의 의미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인간은 오직 하느님을 관념적으로 믿고 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며, 죽은 후 내세에서 영원히 산다는 망상에 사로잡혀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다른 생명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종교적 권위와 인간이 만든 어떤 하느님에 대한 교리와 믿음 보다 최우선적으로 소중하다. 인간은 만들어진 신 또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되었거나 존재하거나 희생될 수 없으며, 그런 맹신을 강요하는 하느님은 이미 죽었다. 전통적인 신자들은 고대인들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만들어진 신들을 하루속히 추방하는 것이 자신과 가정과 사회를 위해 지극히 현명하다.
21세기 우주진화 세계관을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정직하고 이성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 인간이 밤하늘의 별들을 보는가? 아니면 별들이 우리를 보고 있나? 주류 과학계는 밝히기를, 현대과학이 공개적으로 계시(啓示)하는 138억 년의 우주 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여기에 있나? 에 대해 상식적인 답변을 제시한다. 물론 우주 이야기가 주는 답변은 과학적이고 동시에 종교적이다. 또한 우주 이야기의 해답은 서로 다른 세계관 즉 삼층 세계관과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살고 있는 수십억 인류에게 건강하고 아름답고 생명이 넘치는 밝은 미래를 위한 공통의 대의가 된다.
오늘 밤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들과 은하계를 바라 볼 것이다. 물론 21세기의 우리는 천체학, 진화생물학, 화학, 물리학, 지질학 등 현대과학으로부터 입수한 정보들에 근거하여 육안으로, 천체망원경으로, 그리고 인공위성 창 밖을 통해서 밤하늘의 은하계를 본다. 수천억 개의 별들이 무리를 지은 우리의 은하계는 100억-130억 년의 진화과정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포함해서 수많은 별들을 탄생시켰다. 주목해야 할 것은, 수천억 개의 은하계들은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45억 년 전 하늘 밖의 초자연적인 힘이 개입해서 미리 설계한대로 완성품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지구는 오랜 세월동안 우주의 지율성과 창조성의 진화과정에서 우연히 자연적으로 출현했으며,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물론 우리 인간도 우주의 자율적인 진화과정에서 20-30만 년 전 지구에 출현했다. 따라서 우리가 은하계를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을 탄생시킨 모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은하계를 보는 것은 우리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다. 은하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은하계에 의해 탄생한 바로 그 눈이다. 따라서 이성적인 우리는 우주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고, 자신을 아는 눈이다. 인간이란 지구가 의식의 눈이 뜨여져 자의식하게 된 생물종이다. 인간을 통해서 지구는 자신에 대해, 자신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자신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간은 언어를 발명했으며,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세상들을 창조했다. 이러한 진화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위해 궁극적인 진리를 인식하고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인간은 자의식을 지닌 우주이며, 지구 자체이다. 우주와 지구와 인간은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으로 자연스럽게 운행하고 있다. 우주의 법칙을 간섭하고, 인간을 통제하는 초자연적인 힘은 존재한적도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 즉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폄하하거나 가로 막는 하느님과 믿음체계의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방해하는 장애물일뿐이다.
삼층 세계관의 고대인들은 우주적 자연으로부터 느끼고 깨달은 생명의 신비스러움과 경이로움과 황홀함을 하느님, 야훼, 하늘님, 알라, 브라만, 도, 위대한 영, 등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성서와 코란과 경전들을 기록했다. 종교적 경전들에 묘사된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를 현대어로 전환하면, 전체적 우주(세계), 우주를 구성하는 개체들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된 전체, 우주적 삶의 현실적인 실제(實際), 인간의 온전한 삶의 요청, 자율적인 삶의 요청, 행복한 삶의 비전, 평화로운 삶의 희망을 뜻한다. 기독교 성서는 이것을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형상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형상이란, 이성적인 인간의 본성이고, 인간의 존엄성이며, 인간의 창조성 자율성 가능성 그리고 잠재력이다.
우주를 인식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하느님이란 인간의 숭배대상이 될 수 없다.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는 인간의 온전한 삶에 대한 요청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자율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에서 깨달아 알게 된 궁극적이고 관계론적인 실제(實際)이기 때문에 반드시 믿어야 하는 존재론적 실재(實在)가 아니다. 즉 하느님이란 인간의 온전한 삶의 방식이고 표현이다.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인간 언어의 창작품이다. 또한 삼층 세계관의 믿음체계는 교회를 보호하고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최후심판과 지옥천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우주는 하나의 생명의 망이라는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하늘 위에 인격적인 하느님이란 없을뿐만 아니라, 어떤 하느님이라도 인간 보다 더 소중할 수 없다.
하느님의 Reality 는 "실재(實在)"에서 "실제(實際)"로 교체되어야 한다. "실제"라는 단어의 의미를 "사실의 경우나 형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재"라는 용어는 사전에서 "실제로 존재함", "사물의 본질적 존재" 등의 의미이다. 지금까지 서구 기독교에서 전해진 Reality를 실재(實在) 또는 실제(實際)로 번역했다. 하느님의 실재(實在)와 하느님의 실제(實際)는 큰 차이가 있다. 하느님의 실재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물질적이고 인격적이고 외부적인 존재에 대한 말이고, 하느님의 실제는 그 반대로 믿어야하는 객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계론적인 삶의 현실이다.
성서에 기록된 모든 예수의 치유 이야기들은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각시켜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은 종교, 신앙, 전통, 교리, 그 무엇보다 더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은유적인 이야기들이다. 21세기 기독교인들은 신구약 성서의 모든 기적 이야기들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참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 예수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18년 동안 허리도 펴지 못하고 마치 암흑 속에서 죽지못해 살았던 여인을 보았다. 예수는 가르치던 것을 즉시 중단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치유해주었다. 이 여인의 희망은 오랜 세월동안 종교적 율법과 가부장 제도와 형식에 짓눌려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체 생존해온 자신의 절망과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는 예수가 안식일법을 어기고 여인을 치유해주는 것에 대해 격분하여 예수를 비난했다. 안식일에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행해서는 안된다는 소위 하느님의 율법은 유대교 율법 중에 가장 으뜸가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