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가 4월 22일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개신교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한겨레 신문이 보도했다. “개신교인 26%가 본인 또는 가족이 전도 등의 명목으로 신천지 교회와 접촉을 한 경험이 있으며, 7.6%는 가족이나 친지 가운데 신천지 교인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미 국민들이 인지하고 있지만, 신천지 교회는 전국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 19 감염 확산의 중심지이며, 바이러스 감염을 무시하고 여전히 일요일 예배를 고집하는 개신교 교회와 이 교회에 동조하는 보수 정치인들은 한국사회의 밝은 미래에 걸림돌이 되는 해로운 존재이다. 또한 그들이 맹신하는 하늘 위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아무 쓸데없는 무용지물이다.
의학자들은 코로나 바이러스 19 팬데믹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최악의 위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어린 아이들로부터 노연층에 이르기까지 바이러스는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으며, 감염추세는 장기화될 전망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종교와 정치의 지도자들은 솔직하고 이성적인 지혜의 말로 국민들이 두려움과 불안에 빠지지 않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동적이고 보수적인 교회들과 정치인들은 오히려 국민들을 혼돈에 빠트려 사회를 분열시키고, 결과적으로 팬데믹의 위험을 가증시키고 있다.
특히 내세지향적인 중보교회들은 이 세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공동체적인 협력을 무시한체 사람들에게 예배집회를 강요하고 있다. 그런 교회와 하느님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 아무 쓸모가 없을뿐만 아니라 해롭다. 종교의 기능은 하느님을 객체적인 존재로 맹신하거나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다. 종교는 오직 인간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고취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율성은 교회와 하느님 보다 훨씬 더 힘이 있고 소중하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종교의 의미에 대해 대단히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잘못된 종교적 개념으로 세뇌된 교회들은 마치 자연의 법칙이 깨어지는 기적을 바라는 무당집 정도로 전락했고, 예수가 경고한대로 거짓과 위선과 은폐로 뒤덮힌 회칠한 무덤이 되었다.
21세기의 참 종교의 의미와 기능은 다음과 같다: 종교의 목적은 유황불이 타오르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한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부자가 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불치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종교의 기능은 거룩한 교인과 벌레만도 못한 죄인,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분리하는 교리적인 도덕이 아니며, 성속의 경계를 초월하는 삶의 방식이다; 종교의 의미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형편과 상황에 처하더라도 참 인간됨과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종교는 내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 영원함을 추구하는 현세적인 삶의 길이다; 종교는 불확실성의 우주에서 내가 어디에서 왔고, 왜 여기에 있고, 어떻게 사느냐의 지혜를 탐구하는 것이다; 종교는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기 보다, 모든 개체들의 우주적인 통합을 이룬다; 무엇보다도, 종교는 타자 또는 중개인이 만든 공식과 교리와 형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거나,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자신의 깨달음과 체험을 통해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렇게 종교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단 또는 회의주의라고 정죄하던 시대는 이미 끝이 났다.
결론적으로 종교는 평범한 삶의 언어와 행위이다. 종교는 특정 교리와 전통에 순종하고 믿는 것이 아니다. Religion이란 말이 최초로 동양에 들어왔을 때 번역하기가 대단히 힘들었으며, 결국 종교(宗敎)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번역이 못된다. Religion이란 말의 어원은 relationship(관계)이다. 종교는 두려움과 편견과 우월주의와 배타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개체들이 통합하여 전체를 이루어 온전한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종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자연의 관계, 다시 말해 전체적인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인간의 성숙한 삶을 위한 지혜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종교이다. 특히 종교는 타율적인 복종이 아니라, 자율적인 깨달음이다.
종교는 교회나 성전이나 사찰을 찾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세상에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다. 종교인들은 자신의 행위로부터 자신의 신앙을, 또한 자신이 하는 일로부터 자신의 믿음을 분리시킬 수 없다. 하느님을 위한 시간과 나 자신을 위한 시간과 내 이웃을 위한 시간을 따로따로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경계 넘어 숨쉬고 움직이고 사는 모든 것이 종교이다. 다시 말해, 생각하고 창조적이고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호모싸피엔즈 인간은 종교적인 생물종이다.
인류 역사에서 지난 1세기 동안에 인류사회는 엄청난 격동과 변혁을 가져왔다. 첨단과학의 발달은 물론 신학, 철학, 예술, 문화의 분야가 초고속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이 거대한 지구촌이 이제는 하루 생활권이 되었다. 그러나 반면에 지난 백년 동안에 수없이 많은 전쟁과 테러 사건들이 있었다. 큰 전쟁들만 열거해도1차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월남전쟁, 발칸반도전쟁, 걸프전쟁, 이락과 아프가니스탄전쟁, 등으로 수 천만 명이 죽었으며, 아흐슈비츠 포로수용소 대학살과 9/11 뉴욕의 테러사건과 북아일랜드, 아프리카, 캄보디아, 팔레스타인, 등 세계 도처에서의 테러들로 인해서 무고한 생명들이 수 백만 명 살해되었다. 대부분의 전쟁과 테러는 종교적 분쟁들이었다.
더욱이 생명체들과 자연이 공존하는 인류의 집 지구의 생태계가 최악의 위기를 맞이했다. 과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경고하기를 이대로 가면 지구는 멸망한다.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오직 유일하게 지구뿐인 데 지구가 죽으면 갈데올데 없이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경고다. 지구는 땅과 물과 공기와 불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서 있는 땅은 인간과 동물과 식물과 광물의 생명줄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개체가 죽으면 전체가 죽는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인간 만이 홀로 생존할 수 없다. 이 세계는 심판받아 멸망할 세상이라고 못본체 하거나, 버려두고 다른 세계로 이주해 갈 수 없다. 이 세계는 최종적이며, 이 세계 이외에 다른 세계는 없다.
미국의 종교철학자 로열 루(Loyal Rue)는 자신의 저서 <Religion Is Not About God>에서, 종교는 인간에 대한 것이지 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밝힌다. 다시 말해, 종교는 인간과 다른 생명들이 살고있는 자연세계를 존중하고 온전하게 보존하는 것이지, 하늘 밖의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성스러운 인간세계와 자연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하느님을 살아내는 것이다. 하느님이란 믿어야만 하는 객체적 존재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고 표현이다. 하느님 따로 있고, 인간세계 따로 있고, 자연세계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종교와 하느님은 인간의 온전함을 위해 있다. 수세기 동안 인간을 통제했던 하느님에 대한 신학은 인간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을 위한 학문이 되어야 하고, 인간의 본성에 근거해야 한다. 따라서 참 종교는 인간의 본성에 영향을 미쳐서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깨닫고, 정의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준다. 종교의 기능
현대 문명과 과학을 잘 융화하신 글입니다.
좀 쉽게 안들어 오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목사님이 이런글을 쓰신거에 놀랍습니다.
그럼 제가 과학을 융화하신 점에서,
한가지 골치 아픈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나는 내일 죄를 더 짓는 나로 살수도 있고,
또는 내일 회계하는 나로 살수가 있습니다.
정확한 과학으론 고차원에서는 두계가 아니 더 많은
내가 실제적으로 존제할 겁니다.
더 쉽게 말하면, 오늘의 나는 나쁜 사람이 되고,
또 착한 사람이 되는 양면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럼, 지금 나는 아무리 회계를 해도 악행을 하는
내가 미래에 엄현히 존재합니다.
다른말론, 하나님의 벌또는 상은 이미 정해져 있고,
내가 바꿀수 없는 거고,
그중 상받은 나와, 벌받는 내가
지금 동시에 존재한다는 겁니다.
다르게 설명을 하면, 오늘의 나는 과거가 정해져 있듯이,
미래도 다양하게 정해져 있고,
오늘 나는 아무것도 하는게 아니라,
그 수많은 경우의 수중
하나에 미래의 나로
그냥 필연으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즉 거기에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영향을 끼칠순 없고,
오늘이 내일을 바꿀수 없다는 가정하에,
신의 존재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신의 존재는 우릴 끈임없이 종교의 가르침대로 살라고
가르칩니다만, 미래를 바꾸길...
현 과학적으로만, 보면,
이미 정해져 있는 미래를 바꿀수 없습니다.
다만, 여러가지 미래의 모습중 하나로 갈뿐입니다.
즉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쁜사람과 좋은 사람이 동시에
정해진 겁니다.
마치 사다기 타기 처럼,
나에게 사다리는 다 결정되엇고,
그중에 어떤걸 택해도 이미 결과가 정해졌단 말이죠.
물론 어떤 사다리를 타냐는 결정은
또 과거에서 보면 그냥 경우의 수중 하나가 되지요.
즉 우린 개인이 실모습은 수많은 나로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여기 까진 과학이고,
그럼 질문은 과학적으로 무엇을 바꿀수 있나요?
종교의 가치는 삶을 하루 하루 좋게 바꾸는건데요?
현재의 나는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미래와 함께 정해져 있는데요?
하지만, 신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과학적으로 설명은 안되지많요.
뷴명 제 경험엔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논리가 성립될수 잇는지 전 모르겠습니다.
참어려운 질문을 드렸습니다.
많은 의문이 종교에 있을수 있습니다. 기독교도 포함해서요.
다만,
그걸 현대의 과학으로 연결 해서 비과학적이라고 비판을 하면,
사실 제가 올려드린 윗글에 대한 과학적인 답이 나올수 없습니다.
아마 제글에 답을 명확하게 다시면, 대단한 일이기도 합니다.
전 여기서 이렇게 설명을 하고 싶습니다.
엄마나 아빠의 사랑이 과학으로 과연 어떻게 설명이 될까 싶습니다.
과학으로 보이지도 존재하지 않는 사링을 말이죠.
신의 사랑은 우리 맘속엔 너무나 선명하게 있습니다.
그게 우릴 나쁜일을 못하게 계속 막는 힘이기도 합니다.
과학하고 영의 세계는 불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쩜 현 과학을 넘는 세로운 지식일진 몰라도 말입니다.
불쾌하시진 않으셧으면, 아직도 명쾌한 답을 들어본적이 없으니까요.
물론 주제넘었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저의 칼럼을 다시 읽어 주시면 오늘 여기에 올린 저의 생각을 좀 더 이해하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전통적인 종교, 제도적인 종교, 삼층 세계관의 종교, 과학과 철저하게 분리된 종교는 쉽게 말해서 마치 복권을 산 기분과 비슷합니다. 즉 낡은 종교는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수천만분의 일 정도의 확률을 갖는 복권당첨에 크게 기대를 겁니다. 복권을 주머니에 넣고 있으면 마치 복권에 당첨된듯한 망상에 젖어듭니다. 인습적인 종교는 마치 마약에 취했거나 복권을 산듯한 기분에 젖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21세기 첨단과학 시대의 참된 종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과학이 인간의 온전한 삶을 위한 절대적인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대단히 과학적인 생물종입니다. 즉 이성적이고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동물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과학을 살아가고 인간의 본성이 과학입니다. 과학은 인간의 정체성입니다.
종교는 과학의 기초 위에서 생각되어야 설득력과 효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