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 개신교의 “불량 신학”에서 나온 “불량 믿음”이 바이러스 팬데믹의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 국민들의 귀한 생명을 위협하고,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개신교 교회들은 과학을 무시한체 하느님이 바이러스를 막아주고, 비단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더라도 천국에 올라간다는 광신적인 믿음에 사로잡혀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불량 믿음의 원흉은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거부한 가짜 바울의 불량 신학이다. 이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가짜 바울은 기독교가 세계를 정복하는 소위 복음화의 살인도구로 악용한 성차별, 성적본능차별, 종교차별, 인종차별, 빈부차별이라는 사회악의 근원이 되었다. 더욱이 교회는 현실적인 세상에서 수많은 동료 인간들이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참담한 모습들을 못본체하거나 무시해버리고, 죽은 후 자신들만 하늘 위의 천국으로 이주해가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내세적인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불량 믿음으로 예배를 고집하는 것은 무지함과 무식함의 파렴치한 행위이다. 원초적으로 기독교는 예배의 종교가 아니다.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가 밝혔듯이,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보상심리의 믿음과 형이상학적인 예배의 종교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대로 우주적인 생명과 현실적인 삶의 종교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1세기의 초대 교회가 따랐던 원초적인 역사적 예수의 본질과 그의 삶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때문에 심하게 변질된 가짜 바울의 불량 신학에 병적으로 세뇌되었다. 지난 수세기 동안 교회는 진짜 바울의 신학을 거부하고, 가짜 바울에 의해 심하게 오염되어 예수의 정신과는 정반대로 부족적이고 내세적인 이분법적 믿음체계를 강화했다. 따라서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를 보호하고, 사람들을 획일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성서문자근본주의의 원죄론과 대속론을 창작했으며, 차별주의와 우월주의와 배타주의의 노예가 되었다. 21세기의 기독교인들은 생존하기 위하여 로마제국에 아부하여 참 사람 예수를 배반했던 교회의 가짜 바울을 추방해야 한다. 그리고 가짜 바울이 주장하는 하늘에서 내려온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하느님으로 만들어진 교리적 예수 이전의 갈릴리 호숫가를 거닐던 진짜 바울의 역사적 예수를 되찾아야 한다. 이 참 사람 예수가 누구인지 바르게 알려면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복음서 저자들보다 먼저 최초로 예수의 전승을 기록한 진짜 바울의 신학과 신앙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들이 기록되기 이전에 예수에 대해서 어떤 기록들이 있었는데 복음서 저자들이 이 기록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알아야 한다. 가짜 바울의 신학으로부터 나쁜 영향을 받은 복음서들에서 참 사람 예수의 모습은 감추어졌고, 그대신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는 하느님 예수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잃었던 역사적 예수를 재발견하는 성서비평은 주류교단들의 신학교의 신구약 강의에서 필수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문제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 살기 위해 목사들은 배운대로 설교하지 못하고 잘못된 가짜 바울의 불량 믿음을 가르친다. 따라서 교회는 낡은 신학과 신앙으로 생기를 잃고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다.
성서학자들의 성서비평에 따르면, 1세기경의 고대 사회에서 글을 쓸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현대 사회처럼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보다는 자신보다 더 잘 알려진 사람의 이름으로 서신이나 책을 썼다. 따라서 성서의 대부분의 저자 이름들은 확실하지 않으며 오직 이야기의 내용으로 저자를 상상할 따름이며, 신약성서의 소위 바울서신 13개는 크게 세 사람의 바울 즉 진짜 바울 (authentic Paul), 가짜 바울(pseudo Paul), 바울 이후의 저자(post Paul)로 구분한다. 진짜 바울이 쓴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는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서가 기록된 70년경보다 먼저인 50년대에 기록되었다. 흔히 ‘목회서신’으로 알려진 바울의 이름을 빌려서 쓴 가짜 바울의 서신은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이며, 이것들은 기원후 100년경에 기록되었다. 바울이 쓰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는 바울이 죽은 후 한 세대 정도 지나서, 진짜 바울과 가짜 바울의 중간 시기에 기록되었다. 또한 7개의 진정한 편지를 쓴 진짜 바울을 급진적인 바울, 목회서신을 기록한 가짜 바울을 반동적인 바울, 바울 이후의 저자를 보수적인 바울로 부르기도 한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정신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어느 바울을 소중하게 대할 것인지 즉 진짜 바울의 우주적인 신앙과 가짜 바울의 부족적인 불량 믿음을 분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냐에 따라서 역사적 예수의 본질과 삶의 모습은 물론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이 180도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에베소서와 디모데전후서를 기록한 가짜 바울은 예수의 정신에 크게 어긋나는 성차별, 빈부차별, 인종차별, 종교차별을 서슴치 않고 옹호한다. 따라서 가짜 바울은 모든 인간의 평등성과 존엄성을 주장하는 진짜 바울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반동적인 바울(anti-Paul)이다. 예수가 죽은 후 제도적인 교회가 탄생하면서 근본주의와 정통주의와 보수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 생겨났다.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때문에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그대로 따르는 진짜 바울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짜 바울의 서신을 기록했다. 다시 말해, 반동적 바울의 서신(목회서신)은 공동체 안에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몰아내거나 재교육을 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여성과 남성, 유대인과 이방인, 자유인과 노예, 귀족과 평민, 부자와 거지, 건강한 사람과 병약한 사람의 차별을 반대하는 예수의 정신을 그대로 따르는 진짜 바울의 가르침을 잠잠케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안전하게 생존하기 위해서 로마제국의 보호를 받아야하고 당국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공동체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획일화 작업이었다.
1-2세기에 초대 교회를 탄압하던 로마제국의 통치가 얼마나 혹독하고 잔인했는지 상상할 수도 없다. 당시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바울의 공동체들의 구성원들은 평민들로서 도시 노동자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가난과 질병 속에서 열악한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생존의 두려움 가운데에 살았다. 따라서 진짜 바울은 공동체들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라서 살자고 생동감 넘치는 격려의 편지를 보냈다. 로마제국의 군사적인 탄압과 착취 아래에서 예수의 정신을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며 산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리겠다는 것과 같았다. 물론 현대 기독교인들도 예수의 정신을 따라서 산다는 것이 개인적인 관계와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에서 얼마나 어려운지 매일매일 체험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은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 교회들의 내부에서도 가짜 바울이 기득권을 쥐고 진짜 바울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다. 오늘 현대 기독교인들은 13개의 바울 서신들을 성서비평을 통해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 비단 진짜 바울의 서신들일지라도 성서비평없이 문자적으로 읽고 직역적으로 믿으면 가짜 바울의 서신과 다를바가 없다. 물론 가짜 바울의 서신들도 성서비평을 통해 왜 그렇게 기록되었는지에 대해 알면, 진짜 바울의 신학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황금만능주의 세상의 기준과 역사적 예수의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또한 예수의 기준대로 조건없이 사랑하고, 사심없이 살아야 한다는 불편한 진리를 설교에서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목사들에게 치명적인 어려움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교인들을 잃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목사가 교인들에게 매주 일요일에 반드시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하느님이 징벌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교회 재정에 큰 손실이 따르며, 목사는 파면된다. 그러나 비양심적인 행위와 비상식적인 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생존할 수 있다는 세상에서 순수하고 정직하고 사심없는 말을 듣기가 대단히 힘든데 그래도 교회에서만은 양심적이고 상식적인 말, 즉 말이 되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가 세상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와 목적은 내면적으로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깨닫고, 외부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교인들의 삶의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느끼고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기독교 교회의 신학과 신앙과 삶의 핵심이다. 오늘처럼 지구적 바이러스 팬데믹의 긴급한 상황에서 교회는 자신들이 주장하듯이 세상을 구원하려면 솔선수범해서 공동체적인 바이러스 방역에 앞장 서야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교회의 예배를 자제하라고 경고한 것에 대해서 바이러스 방역은 정치적인 사기극이라고 횡설수설하면서 예배드리다 감염되어 죽으면 순교이고 천국에 간다는 믿음은 상업적이고 추악한 망상이다. 이와같은 불량 믿음의 근원은 차별성과 우월성을 부추기는 가짜 바울의 신학에서 비롯되었다.
진짜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따른 공정한 분배의 정의로운 하느님을 온전히 깨닫고, 그것을 용감하게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역사적 예수의 하느님은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인 종교체제와 불의한 사회구조와 불공평한 경제구조에 대해서 슬퍼한다. 바울이 깨닫고 심층적으로 살아내려 했던 예수의 하느님은 누구에게는 상을 주고 누구에게는 엄한 벌을 내리는 무서운 재판관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