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자들은 기존 사회의 종교체제와 정치제도에 도전하는 불편한 진리를 선포했다. 1세기에 현자 예수는 인간의 본성을 폄하하는 이기적이고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인 성전종교와 혹독한 탄압과 착취로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로마제국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만인평등을 외쳤다. 예수는 성공주의와 황금만능주의에 세뇌되어 안정만을 추구하는 2% 부유층과 인간의 존엄성인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을 박탈당한체 사람답지 못하게 빈곤과 질병 속에서 신음하는 98% 민중들을 향해 새롭고 불편한 진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외쳤다. 예수 당시 98% 민중들은 하루에 한 끼를 먹을 수 있으면 천만다행이었으며, 반면에 2% 부유층들은 98%의 물자와 재산을 독점하고 사치스럽게 살았다. 예수는 이러한 불균형에 대해 성전과 제국의 기득권자들과 자포자기에 빠진 민중들에게 이 땅 위에 공정한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가 세워져야 한다는 불편한 진리를 선포했다. 다시 말해,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죽은 후에 다른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이 세계에서의 참된 인간의 온전한 삶이었다. 물론 예수의 불편한 진리는 고통과 절망에 빠진 대다수의 민중들에게 희망과 밝은 미래의 비전이 되었다. 불행하게도 예수는 불편한 진리를 반대하는 성전의 음모로 로마제국의 십자가 처형으로 희생되었다. 참 사람 예수는 낡고 진부한 과거의 패러다임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작하는 종교개혁가이며 사회개혁가였다. 예수는 불편한 진리의 예언자였다. 예수는 거짓과 은폐로 안정을 추구하는 기득권자가 아니라, 불균등과 차별과 탄압과 착취에 항거하여 공정한 분배의 정의와 만인평등이라는 불편한 진리를 선포했다. 따라서 민중들은 예수의 정신을 따랐으며, 이것이 기독교가 탄생하는 원초적인 동기가 되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의 불편한 진리를 살아내는 것이다.
성탄절에 가장 인기있는 이야기들 중에 하나는, 동방의 현인들이 예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예수를 방문했다는 동방박사 이야기이다.(마태복음서 2:1-12) 또한 이 이야기는 교회 예배력에서 새해가 시작되는 첫 예배(현현절)에서 읽을 만큼 대단히 소중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동방의 현인들이 예수를 방문한 이야기의 메시지는 예수만이 온 인류의 구세주이자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이고, 기독교만이 유일하게 진실한 종교이고, 기독교인만 하느님의 축복과 구원을 받고 비기독교인들은 징벌을 면치못한다는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인 교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참 사람 예수의 정신에서 탄생한 기독교의 핵심은 교리적 믿음을 통해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도 아니고, 죽은 후에 천국에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이 세계는 멸망하고 다른 세계로 이주해가는 준비도 아니다. 예수가 산 것처럼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의 목표이고, 의무이며 책임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기독교가 역사의 격량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역사의 중요성을 다루고, 이 세계의 역사적 진보를 위해 헌신한다. 보수성향의 내세적인 기독교인들은 역사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의 기독교는 역사의 완성을 요청한다. 그래서 역사는 중단없이 진행되어 가고,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 기독교의 핵심은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이다. 하늘 위에서 내려온 하느님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태어나고 이 세상에서 죽었던 역사적 예수의 생애가 기독교의 출발점이다.
역사적 예수는 처음부터 불편한 진리를 선포하고 참된 인간의 본성을 가르쳤으며, 이것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자신의 삶의 모습으로 보여 주었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사를 살펴보면 예수가 죽은 후에 탄생한 원초적인 예수의 기독교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거부하고 교회의 기독교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교회는 예수를 하늘에서 내려온 초자연적인 하느님으로 변형시키고, 이에 따라서 교회는 제도화-교리화-상업화되어 편안하고 안일하고 달콤한 진리를 쫓기 시작했다.
성서를 신중하게 읽으면 참 사람 예수는 철학적이거나 세련된 학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수는 더없이 쉽고 단순했다. 예수는 마치 시골 농부나 어부처럼 말했다. 그러나 예수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은 확실하고 구체적이었다. 또한 예수가 가르치고 살아내었던 불편한 진리는 이론적이거나 교리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았다. 그의 진리는 때로 매우 고차원적인듯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나의 이기적인 사심과 두려움과 편견을 내려놓기만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진리는 세속적이고 흙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의 진리에서 풍기는 향기는 마치 비가 내린 후 흙에서 나는 냄새와 같아서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는다. 그 향기는 장터나 바닷가나 빈민굴이나 논밭이나 어디에서나 맡을 수 있다. 예수의 진리는 하늘의 허공을 떠도는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이고 교리적이고 문자적인 말장난이 아니라 세속적인 삶의 현장 한복판에 살아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의 불편한 진리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믿음의 언어가 아닌,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언어이다. 예수는 성전이나 신학교나 교회나 소위 거룩한 곳에서 가르치지 않았고, 그대신 시장터나 바닷가나 들판이나 산 위에서 가르쳤다. 예수는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진리를 복잡하고 힘든 언어로 왜곡해서 말하지 않고, 삶의 현장 속에서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마음이 가난하고 / 슬퍼하고 / 온유하고 /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르고 / 자비를 베풀고 / 마음이 깨끗하고 / 평화를 위하여 일하고 /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다”는 성서구절들에서 무엇을 믿어야 한다는 말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