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에 초대교회나 21세기에 현대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상상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숭배하고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라서, 이 세계에서 거짓 자아를 넘어서 참되고 온전한 인간이 되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이다. 교회의 생명은, 사람들이 전지전능하다는 그런 하느님에게 의존하고 수동적으로 살도록 강요하기 보다는, 예수의 정신을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이고 자율적인 삶을 온전히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돕는 것이다. 따라서 21세기 우주진화 세계에서 기독교인이 되고 교회에 다니는 의미와 목적은, 세상을 등지고, 소위 경건하고 거룩한 신자(believer)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참된 인간(human being)이 되기 위해서다.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에 다니고 기독교에 속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도덕적인 사람의 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얄팍한 술책으로 마치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은 깨끗하고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며, 교회 밖의 모든 비기독교인은 비도덕적인 죄인들이라는 새빨간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늘어 놓았다. 분명히 말해서, 기독교에 속하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도덕적인 사람의 징표가 아니라, 예수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정신을 구체적으로 살아 내야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보상심리의 믿음과 인간됨의 도덕을 왜곡하는 유치한 행태를 중단해야 한다. 교회는 도덕의 의미를 종교적 교리와 혼돈해서는 안되며, 특히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인 차별수단으로 변질시킬 수 없다. 예수는 종교체제의 도덕선생이 아니었다. 예수는 도덕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으며, 오직 인간의 상호의존관계에 대해서 가르쳤다. 예수의 가치관과 윤리관은 초자연적인 신을 보상심리로 믿는 믿음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소위 거룩한 종교인이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참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예수는 성전종교가 사람들을 폄하하고 차별하고 탄압하고 착취했던 종교인=도덕인이라는 거짓과 가식의 공식을 철저히 반대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예수의 현실적인 언어를 배우고, 그의 언어가 담고 있는 심층적인 의미를 살아내야 한다. 예수의 언어는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이나, 유신론자나 무신론자나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경계 넘어, 우주적인 언어였다. 예수의 언어는 교회 내부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내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종교적 언어가 아니었으며, 특히 세속적인 세상에서 이해하지 못할 신비스럽거나 비밀스러운 괴상한 언어도 아니었다. 오늘 현대 교회는 예수의 현세적이고 세속적이고 통합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나? 아니면 교회 내부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코드화된 비상식적인 언어인가? 교회가 주류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심각하게 고령화되어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사회적이고 개혁적인 역사적 예수의 언어를 거부하거나 회피하고, 두려움과 공포와 이기적 욕심에서 만들어진 소위 거룩한 예수의 입에 올려놓은 자아도취와 자기기만의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인 언어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해서,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따르면, 현대인들이 기독교인이 되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목적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기 위해서도 아니고,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 사업에 성공하여 부유해지기 위해서도 아니고, 더욱이 죽은 후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에 올라가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도 아니다. 예수는 그런 표층적인 믿음에 대해서 전혀 가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런 유치한 행태로 민중을 폄하하고 탄압하는 종교체제에 철저히 반대했다. 오늘 현대 교회는 예수가 그렇게도 반대했던 체제의 교리와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는 믿음체계를 구축하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데에 광분하여 비상식적인 언어와 행동을 일삼는다. 기독교 교회사에 따르면, 예수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담대한 사람들이 로마제국의 혹독한 통치와 탄압에 항거하고, 박탈당한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서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았던 것이 초대교회의 시작이었다. 물론 교회는 하느님을 보호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오직 예수가 가르치고 살았던 대로, 현세에서 불평등과 불의의 세상을 개혁하고,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세워졌다. 따라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의 혹독한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할 수 있었다. 21세기에 기독교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1세기의 예수가 종교체제와 정치체제가 높게 쌓아 올린 성차별-인종차별-종교차별-빈부차별의 경계를 허물어
히브리인 성서(구약)는 고대 히브리인들이 1000여 년 동안 방황하면서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자유하고 온전한 인간의 삶에 대한 비전과 꿈을 하느님이란 말로 은유적으로 표현한 고대 문서이다. 1세기 무렵에 기록된 그리스도인 성서(신약)는 히브리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던 유대인들이 혹독하고 이분법적인 인격신론의 하느님을 신봉하는 성전종교와 로마제국의 잔인한 탄압과 착취의 통치 하에서 역사적 예수로부터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깨닫고, 삶의 용기와 희망과 힘을 얻어 새로운 패러다임의 하느님의 의미와 인간의 의미를 기록한 책이다.
하느님이란 말의 정의와 의미는 3천년 전, 2천년 전, 백 년 전, 50년 전, 그리고 2022년에 동일할 수 없다. 만일에 동일하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138억 년의 장구한 우주진화 여정에서, 최근 20만 년 전에 등장한, 인간 생물종은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하느님과 인간의 의미를 발전시키고, 항상 밝은 미래의 비전을 창조해온 특이한 생물종이다.
예수의 신성을 믿는다고 해서,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직역적으로 믿는다고 해서, 하느님이 하늘 위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이고 전지전능한 신으로 믿는다고 해서, 과학이 발견한 진화론을 거부하거나 반대하고,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존재와 기적을 믿는다고, 하느님의 영광을 열심히 외친다고 해서, 죽은 후에 부활하고 영생을 얻어 영원히 살 천국은 없다. 또한 반대로 그런 믿음이 없다고 마땅히 징벌 받아 떨어질 지옥도 없다. 지금 여기 이 세계와 하루하루의 일상생활 속에 영원함이 있다. 우리가 지금 숨쉬고 있는 이 순간이 우리의 영생이다. 기독교 신자들이 맹신하는 대로 이 세상이 멸망하고 다른 세계로 이주해 갈 날은 우주세계의 시간표에는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는 수십억 년 내지는 수백억 년 후에 폭발해서 없어지고, 우리의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와 우주세계도 인간의 상상력으로 헤아릴 수 없는 까마득한 미래에 폭발해서 사라지고, 새로운 태양계와 은하계와 우주가 탄생한다. 그러나 지구와 태양계와 은하계와 우주가 폭발하여 사라지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맹신하는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별의 탄생과 새로운 우주의 시작이다. 인간과 생명과 우주세계는 일회적이며, 죽음은 최후심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탄생이다. 이 우주 이야기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생명과 삶의 여정이다. 일찍이 1세기에 역사적 예수는 이미 이러한 우주적인 세계관의 개념을 가르치고 자신이 몸소 살아 내였다.
교회는 죽은 후에 천국가는 문이 아니다. 교회는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세상으로 나아가는 출구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