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세기 동안 기독교 교회의 소위 세계복음화 물결에 휩싸였던 북미와 유럽과 동북 아시아의 교회는 오늘날 설득력과 신뢰를 잃고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 또한 기독교를 포함하여 전통적인 종교에 대한 실망과 혐오감이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었다. 특히 사회적 고령화와 함께 종교체제의 고령화는 더욱 심각한데, 미래를 이어갈 젊은 세대들은 전통적인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은 무종교 내지는 무신론의 삶이 자신들에게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현대과학이 발견한 우주진화 세계관을 일상생활에서 살아내는 젊은이들은 믿음체계가 억지 주장하는 원죄론과 대속론과 창조론을 이해하기 대단히 어렵다. 더욱이 그들은 이분법적이고 이기적인 교리와 전통을 억지로라도 수동적으로 믿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미련없이 떠났다. 그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고, 예수와 하느님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에게 불행한 일이나 천벌이 내릴 것이라는 교회의 위협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젊은이들은 오히려 하느님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도,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스스로 참된 인간으로 의미있고 행복하게, 사람 답게 살 수 있다고 인식한다. 오늘 기독교 교회가 정면으로 도전 받고 있는 이러한 종교기피 상황은 모른척하거나 거짓과 은폐로 숨길 수 없는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현상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종교 경멸자는 물론 비기독교인도 이해할 수 있고, 무신론자도 신뢰할 수 있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교회가 절실히 필요한 때가 되었다.
기성세대의 기독교인들이 솔직하게 이성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사실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교회에 다니고,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고, 하늘 위의 하느님이 기적을 일으키도록 주문하는 기도를 열심히 하고, 죽은 후 이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을 맹신하는 행태가 아니다. 1세기에 최초로 등장한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역사적 예수의 우주적인 정신을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참 사람 예수가 신성의 예수로 둔갑되면서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비상식적이며 특히 부족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왜곡되었다. 불행하게도, 기독교인들은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와 이기적인 욕심으로 지독한 자아도취와 자기기만에 빠져서 망상적인 믿음의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난 수세기 동안에 과학혁명과 인식혁명을 거친 21세기 현대 문명사회에서 기독교인만 구원한다는 그런 예수와 하느님과 교회는 우리의 가정과 사회에서 신뢰를 잃고 설 자리를 잃었다. 오늘날 어떻게 기독교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체제들이 설득력을 잃고, 생존의 몸부림을 치면서 비상식적인 행태를 일삼고, 이해할 수 없는 억지 주장을 늘어놓고, 가정과 사회를 분열과 혼돈에 빠트리고 있는가? 어떻게 교회는 현대과학을 무시하고, 예수만 믿으면 죽은 후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천국에서 영생을 누린다는 망상의 노예가 되었는가? 어떻게 교회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이분법적으로 차별하고, 성차별과 황금만능주의의 빈부차별을 마치 신학과 신앙의 뿌리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가? 어떻게 교회는 그런 불량 믿음때문에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식하지 못하는가?
반세기 전만해도 지구촌의 종교체제들은 그런대로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듯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과학이 급성장하고 일상화되면서 사람들의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이 성숙해지면서 한편으로 교육받은 종교 경멸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종교 없는 사회, 하느님 없는 종교, 믿음 없는 교회, 내세 없는 종교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외침이 드높아지고 있는 사회적 현상의 주요 원인은, 종교체제가 구축한 삼층 세계관적 믿음체계가 상식을 벗어났기 때문이며, 더 이상 일반대중들을 이성적으로 설득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 위기 상황에서 종교단체들은 자신들의 종교에만 구원의 길이 있다는 착각과 오만과 망상을 버려야 한다. 저 하늘 위에 천국은 없으며, 땅 아래 지옥도 없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여기 일상생활 속에 우리가 만들어낸 현실이다. 21세기 기독교 교회는 교육받은 종교 경멸자들에게 역사적 예수의 우주적인 정신을 솔직하게 상식적으로 설득시킬 수는 이성과 지성과 정직성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오늘 현대 종교인들이 필수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종교의 탄생과 주체는 하느님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의 개인적이고 자율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의 경험에는 세월의 흐름에 따른 새로운 시대와 환경에서 인간의 사고와 언어가 진화하는 것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사고와 언어가 먼저 있었고, 종교와 신관과 세계관은 나중에 왔다. 결국 종교는 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것이다. 인간이 신의 창조자이고, 종교와 교리와 체제의 창시자이다.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은 인간이 필요에 따라서 창작한 교리를 입술로 인정하고 무조건 믿으면 죽은 후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으로 올라가는 구원이 보장된다는 의미 없는 말에 속아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원초적으로, 초대 교회는 교리적 믿음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려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에서 탄생했다. 다시 말해, 교리와 신조는 종교체제의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통제하고 조정하기 위해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그 좋은 예가, 니케안 신조와 사도신경이다.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는 처음부터 교리를 믿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과 삶의 종교로 태동했다. 교리가 세워지고나서 교회와 기독교가 탄생한 것이 아니라, 참 사람 예수, 역사적 예수의 우주적인 가르침과 통합적인 삶이 먼저 있었으며, 그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는 삶에서 교회가 나중에 등장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도 원래의 순서대로, 먼저 예수가 산 것처럼 살면서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교리, 신조, 확신, 그리고 실제로 신학 전체는 자율적인 깨달음과 구체적인 삶의 경험에 뒤따르는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항상 시간, 장소,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으며,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고 고정될 수 없다. 종교 경험이란, 항상 개인적인 것이며, 그것은 시대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서 변하며,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종교체제에서 신앙을 말로 표현하는 교리적인 말들은 결코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수도 없다. 인류사에서 종교체제들의 교리적인 획일성은 가정과 사회를 분열과 혼돈에 빠트렸으며, 전쟁과 테러의 주요 원인이었다. 종교에서 획일성을 요구하는 것보다 더욱 비종교적인 것은 없듯이, 기독교에서 획일성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욱 비기독교적인 것은 없다. 역사적 예수는 종교체제의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인 획일성을 철저히 반대했으며, 대안으로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쳤다.
21세기의 교회는 1세기의 참 사람 예수 곧 역사적 예수의 우주적인 정신을 살아내면 더 이상 젊은 세대들이 떠나지 않고, 고령화를 막을 수 있다. 사실상 교회는 지난 수세기 동안 주류 사회로부터 설득력과 신뢰를 상실했는데,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경고하기를, 교회가 이대로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앞으로 반세기 안에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교회는 예수와 성서에 신중하고 솔직해야 한다. 예수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통제하고 착취하는 성전종교의 상업적인 믿음 곧 보상심리의 내세적인 믿음을 가르치지 않았으며, 더욱이 그런 믿음체계를 신봉하는 종교체제를 목숨을 바쳐서 까지 철저히 반대했다. 교회는 예수가 가르치고 산 것처럼,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지금 여기에서의 온전한 삶, 다시 말해 두려움 없는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삶의 길을 제
사람 예수의 참뜻을 공부하고 실천해나가는 노력은 이제 다른 공간에서 시도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와 교회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한 교회는 희망이 전혀 없습니다. 이미 많은 교회들이 파산했으며 그 숫자는 급증하고 있습니다.
He is Almighty and Sovereign God, we are n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