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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광기?'에 대해
작성자 강현     게시물번호 -2304 작성일 2005-12-30 22:12 조회수 1347

 '지식인의 광기?'에 대해


김창한 님과의 온라인에서의 의견교환이 예기치 않게 오프라인 신문칼럼에 등장한 것에 놀라셨다니 우선 사과 드립니다.  ‘황구라 사태…’ 는 김창한 님의 답글에 대한 재 반론이 아니라 신문독자를 상대로 해 편지형식을 빌려서 작성한 칼럼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반론으로 여겨 댓글을 달아 주시니 저 역시 약간의 내용을 첨가한 재방송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 황우석 사태는 황교수 스스로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당장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상상이상의 복잡한 의문점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단순한 사기사건 인지 아니면 복제기술 과 배양기술의 차이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반인들로서는 추론도 하기 힘든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복마전 인지 단정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증거들이 대부분 제거 된 마당에 음모 가능성에 대한 해석은 탐정소설 수준을 넘고 있지 않습니다. 지난 두 달 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것처럼 언제 또 무슨 변수가 튀어나와 뒤집어질지 알 수가 없는 불안요인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좌파든 우파든 이 사태를 둘러싼 논쟁에 섣불리 뛰어들어 뭐라고 써 갈겨댔거나 입을 놀려댔던 그 수 많은 논객들이 설마 설마 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제 글에서도 ‘흥미’라는 지금 상황에 걸맞지 않는 용어를 써가며 제기했던 의문 이기도 하지만 ‘만의 하나” 미국음모설이 어떤 근거로 힘을 받을 경우 어쩌면 좌파나 ‘황까’ 들이 친미 매국노가 되고 조선일보가 반미구국의 직필 언론으로 추앙 받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중대한 국면에 1 주일 전에 다루었던 ‘사소한’ 용어문제로 또 긴 재방송을 한다는 게 주저되긴 했지만 어차피 일부 인터넷 독자들과 신문독자들이 중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양해 없이 칼럼을 낸 제 부주의함을 통감하면서 약간의 의견을 덧붙여 볼까 합니다.

 

먼저 저널리즘에서 칼럼의 기능에 대한 제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는지 모르지만 저는 약 1 년 8 개월 전부터 씨엔드림에 가끔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어떤 영화에 대한 평론에 이어 대통령 탄핵에 대한 두 차례에 걸친 투고를 한 것을 계기로 이후 부정기적인 칼럼 투고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석의 변도 아닌 칼럼을 쓴다는 게 주제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격려이건 비판이건 의미 있는 피드 백에 중독되어 아직 그만두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종류의 칼럼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제가 이해하고 있는 칼럼의 기능은 이렇습니다.  칼럼은 사건에 대한 사실 정보를 취합해 나열한 취재기사나 이를 토대로 사건을 분석하고 예측 가능한 예상정보를 제공하는 해설기사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필자가 이미 나름대로 해석한 정보를 토대로 자기의 의견을 확립하고 독자를 설득하는 작업이 칼럼집필입니다. 시론이나 평론, 사설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합니다. 대부분의 칼럼은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건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대신 ‘보다 광범위한’ 독자의 눈길을 ‘보다 오래’ 붙잡아 두기 위해 조직적인(조직된 이라고 써야 옳습니다만 ‘조작된’으로 오독하는 독자가 있을 것 같아 다르게 표현합니다) 언어를 선택, 동원하여 필자의 ‘오피니언’을 선전하는 것이 이런 종류의 글들입니다. 

 

조중동 같은 우파 상업언론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제가 관여했던 과거의 ‘민통련신문’ 이나 ‘전민련신문’ 같은 좌파매체에서 역시 칼럼은 대체로 이 성격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칼럼니스트는 심지어 ‘경도된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권리조차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더 많은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선동적인 언어를 선택하여 조직할 수 있습니다. 취재기사는 물론이고 해설기사 조차 ‘광기’라는 단어를 기사작성자의 선택용어로 사용할 수 없지만 칼럼니스트는 그보다 더 추상적인 용어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정보만을 제공하는 기사와는 달리 칼럼은 사상논쟁의 배후에서 대항논리의 가치를 무력화 하거나 삭감시키고 독자대중들을 이론적일 뿐 아니라 감성적으로도 설득해내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널리즘 안에서 기사 장르가 각기 가지고 있는 기능과 역할의 문제이지 이것은 객관적이고 저것은 주관적이다 또는 이것이 정론이고 저것은 속견이다 라는 식으로 제단 할 수 있는 성질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칼럼필자는 자기가 쓴 글에 대해 막중하기 짝이 없는 무한책임을 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잘못된 정보를 담고 있는 취재기사를 쓴 기자는 오보를 사과하고 정정하면 그만이지만 그릇된 칼럼을 쓴 칼럼필자는 그릇된 사상을 전파하는 위험한 이데올로그로 사회적인 매장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오보를 정정하는 기자는 본 적이 있어도 자기가 잘못된 오피니언을 냈다고 ‘깨끗하게’ 사과하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는 칼럼니스트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여론의 지탄을 받을 때 말도 없이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어느 날 갑자기 천사라도 됐다는 듯이 새로운 이빨로 무장하고 재등장하는 논객들은 부지기 수 입니다.

 

이 경우 과거에 대한 일체의 반성이 없는 것은 물론입니다. 슬픈 현실이지만 사실입니다.  어떤 경로로든 칼럼형식을 빌어 독자들 앞에 오피니언을 내어놓은 저 역시 이런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제 언어에 설득되느냐 마느냐 또는 제 의견에 동의하느냐 마느냐는 독자들의 몫입니다.

 

따라서 저는 “강현님이 황우석 지지자들의 부정적 현상을 서술하기 위해서 이 용어를 선택했고 이는 ‘좌파적’ 시각으로 ‘극우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는 김창한 님의 견해에 당연히 동의하면서도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용어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저널리즘의 속견’ 이라는 태생적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제 칼럼의 본질을 크게 훼손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보해석자의 주관으로부터의 출발이라는 문제와도 관계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맨 나중에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광기라는 용어에 대한 제 견해입니다. 김창한 님께서는 광기라는 용어가 특정 사태를 서술하기 위한 적합한 개념적 용어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어떤 사태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학술논문이나 해설기사를 작성하면서 이 같은 용어를 썼다면 김창한 님의 지적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적합한 개념적 용어’ 와 ‘적합한 용어’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칼럼에서 적합한 용어냐 아니냐는 언어분석가들에 의해 사전에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받은 공감도에 의해 사후에 판단됩니다.

 

독자들 역시 필자와 대등하게 이미 취재기사나 해설기사 또는 다른 경로를 통해 정보를 수집 판단하고 있는 정보해석자들이고 필자의 논리와 의견개진을 판단할 능력이 있는 논쟁의 한 축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언론기관이나 대학 학보사 같은데 몸담으신 적이 있다면 아실 겁니다. 모든 기사에 교정 교열 편집권을 가지고 있는 편집국장조차 칼럼교정권은 없습니다. 권한이 있다면 그 칼럼을 싣느냐 마느냐를 결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오자가 나와도 칼럼 필자에게 연락하여 그 오자에 숨은 다른 의미가 있는지 묻는 게 관례입니다. 그리고 광기라는 표현을 주저 없이 쓴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인터넷 토론에서나 칼럼에서 아래와 같이 밝힌 바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짐작입니다만 적어도 그 당시에는 ‘아직 내 이성은 황박을 믿고 있다’는 사람들 보다는 ‘이유야 어찌됐건 믿고 싶다’ 거나 ‘무조건 덮어야 한다’ 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평상시의 보통사람들이 ‘황박사태 수준’의 비상시에 ‘어떤 정도의 몰상식한 사람들’로 돌변할 수 있느냐를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다만 김창한 님의 지적이 이 용어와 용어의 사용이유에 설득되지 않은 독자로서의 비판이라면 저도 더 이상 반론을 펼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 김창한님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광기”라는 단어론 무엇이든 설명이 가능합니다. 2002년 월트컵 때의 응원이나 동계 올림픽 때 김동성 선수의 실격사태에 한국민이 보여 준 것도 “집단광기”며,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하는 촛불대회도 “집단광기”며, 보수 기독교인들이 파병찬성 데모를 한 것도 “집단광기”며, 사태의 추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WTO의 농업정책에 대한 한국 농민들의 시위도 “집단광기”며, 알버타 주민들이 보수당을 전폭적으로 미는 것도 “집단광기”라고 표현해도 반박할 여지를 남겨두지 못합니다.”

 

일반화의 오류는 용어 선택의 잘못에서 비롯되기 보다는 후속 논리의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박할 여지를 남겨두지 못한다는 김창한 님의 지적과는 달리 저는 다음과 같이 반박할 여지를 남겨두겠습니다.

 

월드컵 독일전(예를 들어)에서 한국이 한 골을 먹었을 때 상암경기장의 온 붉은 악마들이 들고 일어나 골을 취소하라며 심판을 협박한 적이 있습니까?  오노의 반칙없이 김동성 선수가 2 등을 했는데 그 소란이 일어났습니까? 미선이 효순이때 미국의 대통령이나 대사가 부모를 찾아와 눈물로 사죄하고 과실인정과 충분한 보상은 수행하고 사고를 낸 병사가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한미행정협정 과 관계없이 여기서 처벌을 받고 싶다고 빈말이라도 했는데 그런 촛불시위가 일어났습니까?

 

이번에는 좀 다르게 표현하겠습니다. 저는 보수기독교인들이 파병찬성 데모를 했다고 해서 보수기독교인들의 데모 자체를 집단광기로 보지 않습니다. 파병될 한국군이 명백한 반인륜적인 전쟁범죄행위를 할 것이 명백하거나 그들 스스로 이 전쟁의 논리적 정당성에 양심이 동의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국익 하나를 내세워 파병찬성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같은 논리로 저는 언젠가 한 칼럼에서 외국지도자 암살을 선동한 팻 로버트슨을 무작정 지지하고 있는 일부 미국인들에 대해서는 ‘집단광기’라는 용어를 사용한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 미 대선 직후에 쓴 칼럼에서도 당시 이라크 전이 대통령과 네오콘 수뇌들의 협박에 못 이겨 정보관계자들이 조작한 가짜 정보로 일어난 부도덕한 전쟁이라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는데도 부시를 당선시킨 일부 유권자들에 대해서도 같은 표현을 한적이 있습니다.

 

나찌 엘리트들의 준비된 이론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이 1차대전 이후 피폐해진 독일의 사회 경제적 현상에 배경을 두고 있듯이 네오콘의 침략전쟁 정당화가 도덕적 저항감 없이 미국의 일부 대중들에게 먹혀 든 것도 기득권 유지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하는 국익론 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런 사회적 현상이 나오게 된 배경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도덕적 저항감이 극복되는 경지라면 일반.대중이 적군파나 알카에다의 이론지도자 수준의 신념가들이 아닌 이상, 종교에 필적하는 초이성적인 심리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심리현상은 이데올로기 경도나 미리 결정된 도그마에의 매몰 그 이상의 문제를 야기합니다. 

 

문제는 이런 심리현상이 집단화됐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죄책감 없는 폭력(물리적이든 아니든)이야말로 집단광기로 표현되는 것에 큰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처절한 느낌마저 주는 이 용어는 일제 말기 나찌치하의 유럽 등 비극적이고 반인륜적인 시대를 다른 시대와 감성적으로 구분시켜 경종을 울리기 위한 수단으로도 사용됩니다.

 

말미에 김창한 님은 다음과 같은 입장의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어느 사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미리 결정된 개념적 도그마 (dogma)를 극복하고 사태 자체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역할이 바로 사회비판가들이나 사회 평론가들이 지향해야 할 태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과서 같은 이 결론에 이론을 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두 문장이 김창한 님이 저를 포함한 모두에게 하시고 싶었던 말씀 같습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말에 저와 같이 성질 급한 사람들의 難讀이나 誤讀으로 인한 오해가 없도록 저는 다음과 같은 사족을 달까 합니다. (여가까지가 김창한 님에 대한 제 답글 입니다 나머지는 제 사족입니다 )

 

모든 논쟁은 정보 해석자의 주관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처음부터 사회 역사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는 어느 사태를 가치중립으로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사태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해석의 관점에 따라 차이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도그마 나 주관적 선입견은 사태의 본질을 파악해 가면서 극복되는 경우가 도그마나 주관적 선입견을 먼저 버린 뒤에 사태의 본질에 접근하는 경우보다 더 일반적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 정보도 없이 버려지지도 않는 도그마를 버리려고 고행을 하는 게 아니라 정보를 비교해 보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경청하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해석의 관점을 당파성에의 미련에 영향 받지 않고 진솔하게 수용해 나가는 정보해석자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태의 본질을 확실히 파악한 뒤에야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중에라도 잠정결론을 내릴 수 있고 여기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습니다. 해설기사의 형식으로든 칼럼의 형식으로든 말입니다. 그리고 새 정보가 나타나서 새로운 사실이 입증되면 두려움 없이 지금까지의 결론을 변경시킬 수 있는 자세, 이런 것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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