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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일기 1) 시간도둑

작성자 떠돌이 게시물번호 19264 작성일 2025-10-12 15:29 조회수 49

 

올해 초 8년간 일하던 장거리 트럭 운전을 때려쳤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나는 지금 뭘까?

 

하루 종일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시간이 부족하다.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간다.

 

같이 살던 아들이 수개월 전에 집을 나가 멀리 떠났다. 투명 케이스를 씌운 무시무시해 보이는 컴퓨터와 두 개의 모니터와 여러 개의 게임 단말기를 두고 갔다. 아들은 나에게 게임을 해 볼 것을 추천했다. 하지만 게임 할 시간이 안 난다.

 

중학교 2학년 때 독일 작가 미카엘 엔데의 소설 모모를 재밌게 읽었다. 모모라는 소녀와 그녀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 시간도둑에게 시간을 도둑맞으며 일어나는 일들을 그렸다. 뜬금없이 수십 년 전 읽었던 소설이 생각나는 것은, 내가 지금 틀림없이 시간을 도둑맞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사전적 의미에서 완전히 ‘백수’ 다. 그런데 왜 이다지도 바쁜 것이냐.

 

가끔 아들이 쓰던 방을 둘러본다. 사람의 손길을 잃어버린 컴퓨터와 게임기들이 처량하다. 그들을 구원하기엔 내가 너무 시간이 없다.

 

잘 지내고 있다. 별일 없이 산다. 백수 생활이 너무 재미있어 시간이 부족할 뿐이다. 아니, 사실은 난 백수가 아닌 것 같다. 백수가 이처럼 바쁠리 없기 때문이다.

 

가만히 요즘의 삶의 양상을 돌아보니 나는 현재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나는 얼마 전까지 간병인이었고, 가정주부이고, 바리스터이고, 투자자이고, 영어를 배우는 학생이며, 다음 여정을 계획 중인 여행가다. 꽤 바쁠 만하다. 그래서 시간이 휙휙 지나간다.

 

트럭 운전을 할 땐 하루에 사계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운전대에서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은 느리기만 했다. 올 초부터는 침실 창문의 커튼을 걷으며 시간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다. 언제나 쨍하고 침실로 쳐들어오던 아침 햇살이 점점 약해지더니 오늘 아침엔 드디어 눈으로 덮인 겨울 풍경이 찾아왔다. 새삼스레 화살과 같이 지나가는 세월을 실감한다.

 

지금까지 참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이 행복은 현재 진행형이다.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간에 관해서는 불만이 많다. 시간 부자가 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이 시간도둑놈만 잡아 족치면 더할 나위 없겠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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