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비님 안녕하세요. 제기 하신 문제 제기에 대해 제 나름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성서를 공부하는 단계라 부족합니다.
첫째, 구약성서의 신에 대한 이해입니다. 바알이나 마르둑에 대한 이해는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아야 될 것같습니다. 당시 다신론적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믿는 야훼 신은 군대식으로 말하면, 장군중의 장군으로서 다른 모든 신들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야훼라는 신이 여러 신들의 무리의 수장 (the head of the council of gods)로 여겨지면서, 그 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바알이나 마르둑은 적대적 하수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현대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도 안되는 이해입니다만 그 당시는 그렇게 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일신적 신념을 가진 기독교인들의 눈에서 볼 때, 다른 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니까요. 그러나 당시로 돌아가면, 유대인들 자신이 다른 많은 신의 존재를 인정했고, 그러한 신의 무리 중에서 야훼가 제일 뛰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다신론에서 유일신론으로 넘어가는, 즉 신의 진화의 중간 단계 쯤으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은 무시하고 야훼와 바알의 적대적 전투를 예수와 부다 (Buddha)의 전투로 보는 기독교인들의 이해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현재 한국 기독교인들을 이해하려면 도킨스의 책을 보면 완벽하다는 것입니다. 도킨스가 구약을 피의 종교로 보는데, 한국 기독교인들이 바로 도킨스가 비판하는 그런 종교적 실천을 하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된다고 하지만, 실제로 언어가 가지는 일차적인 외시의미 (denotation) 때문에 우리는 성서의 문자적 이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필비님의 이해처럼, 성서가 배타적인 것을 생래적으로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성서를 성서가 생산된 자리나 한계를 비판적으로 읽지 않고, 문자적으로 보면 성서는 폭력을 조장하는 심각한 책이 되어 버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종교와 폭력” (religion and violence)의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데요. “성서와 폭력”의 문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한 성서는 폭력을 조장하는 나쁜 책이 될 수 있고, 이런 면에서 도킨스는 옳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킨스를 읽으면 한국 기독교인들이 보입니다.
셋째, 요한복음에 대한 이해도 문자적 이해를 벗어나야 합니다. 사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은 가장 은유적인 것으로 가득찹니다. 마태, 마가, 누가 공관복음서는 공통점도 있지만, 서로 신학적으로 큰 차이가 납니다. 그래도 비슷하게 공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진술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 공관복음서와 완전히 다른 책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즉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즉 신념의 사회적 구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나는 ~이다” (히랍어 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 ego eimi)입니다. “에고”는 우리가 알고 있는 ego (나)라는 뜻이며, “에이미”는 “I am”이라는 뜻입니다. 합치면, I I am, 즉 나 나는으로 “나”를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은유 (metaphor) 중에서 가장 만들기 쉬운 메타포가 바로 “A는 B다” (A is B)다는 것입니다. 시를 쓸 때, 쌩기초가 바로 이 은유입니다. 즉 두개의 사물을 연결시키는 방법입니다. 가령, 우리가 잘 아는 “내마음은 호수요”라는 구절에서 “마음”과 “호수”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물인데 마음과 호수가 등치되면서 새로운 의미작용 (signification)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런 일차원적 은유를 자주 쓰면 유치한 시가 되겠쬬. 요한복음은 바로 이런 일차원적 은유지만 새로운 의미작용을 일으킵니다. 이런 은유를 무시하고 “마음=호수”가 같다고 생각하면 정신이상자입니다. 실제로 정신 이상자는 이런 은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예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gardener” (요 15”1).여기서 “나”는 예수인데, 예수가 진짜 “나무”인가요? 아버지는 농부신가요? 절대로 아니죠. 그런데 “예수=참포도나무”라는 은유를 통해서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진짜 포도가 갖는 속성을 연결시켜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요한 복음 6장 35절 “I am the bread of life”에서 예수가 떡입니까? 절대로 아니죠. 그런데 우리는 예수는 떡이다라는 은유를 통해서 당시 굶주린 민중들에게 이런 표현들은 얼마나 큰 호소력을 가졌겠습니까?
이런 맥락에서 요한복음 14장 6절의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 구절은 요한 복음에 등장하는 “에고 에이미”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길을 오직 우리가 어떤 목포에 도달하는 실체라면, 예수는 실재로 길이 되겠죠. 예수는 빵이요, 예수는 참 포도나무요, 예수는 길이요, 생명입니다. 이것은 실체화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인격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유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수용자의 이해에 달려 있습니다. 길, 진리, 생명을 다른 종교인을 배척하는 것으로 보면 그렇게 해석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이해는 그들의 예수 이해며, 그들의 예수니까요. 우리가 “내마음은 호수”라고 했을 때, 폐수로 시커멓게 오염된 호수로 이해하는 사람이 외칠 때는 우리에게 잔잔한 고요와 평안 같은 것이 아닌 어두운 호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유는 역사를 가집니다. 평화라는 말에도 로마의 평화, 강자의 평화, 군부독재의 평화가 있듯이, 예수를 배척자, 폐쇄자로 보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역사적 전승에서 예수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고, 그 얼굴이 바로 현재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예수상”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인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재 개독교로 알려진 한국 개신교들 사이에서 예수의 인격을 봅니까? 예수는 개발바닥취급당하지 않나요? 적어도 예수의 인격을 이야기하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인격을 닮아야겠죠.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고백은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예수님이 우리의 평화와 자비의 원천(source of peace and compassion)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참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서로 만나는 것은 종교는 우리의 인간성을 확인하는 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요한복음은 예수는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은유라는 도구를 통해서 표현했는데, 이 은유를 실체화된 대상으로 보면 완전히 예수 이해를 오해한다는 것이 저의 글의 논지입니다. 저는 성서학이 전문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상식 선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 우리가 바른 성서 이해, 열린 성서 이해, 비판적 성서이해를 하면 분명히 이런 폭력적, 배타적, 이기주의적 기독교적 신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서를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신학전문가 아닌 사람이라도, 성서비평학 책을 몇 권이라도 본다면 이런 황당한 일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교회에서 교역자가 성서비평학에 대해서 공부를 별로 안했고, 평신도가 문제를 제기하면 신신학이니 자유주의니 하여, 성서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막는다는데 있습니다. 현제 성서학계는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라 poor scholarship이나 아니냐의 문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 찾아 보면 꼭 교회가 아니더라도 인터넷 상에서도 신앙의 동지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의 민주화, 종교의 민주화에 이어, 성서의 민주화가 시급합니다. 즉 성서를 자유롭게 읽고 비평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