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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이야기 속편이다. 전편은 한 달 전에 올렸다. 전편과는 달리 속편은 모든 연령대가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소박하고 잔잔한 이야기다.
용산 전쟁기념관은 국방부 청사와 합동참모본부 길 맞은 편에 자리잡고 있다. 기념관 뒤로 남산타워가 바라보인다.
입장료는 없다. 혹시 도네이션 부스가 있나 살펴 보았지만 그런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순전히 세금으로 운영하고 있는 시설인 듯 하다.
참, 그렇다면 나도 이 기념관에 무료 입장할 자격이 있다 ^^. 나는 분명히 대한민국에 정기적으로 세금을 (그것도 직접세를) 납부하고 있는 납세자다.
전쟁기념관은 옥외전시공간과 지상건물 3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대한 규모의 전시시설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역시 한국전쟁 전시실이다. 기념관이 사용하고 있는 이 전시공간의 공식명칭은 <6.25 전쟁실>이다.
언젠가 우리나라 10 대 청소년 중에 6.25 가 누가 누구와 싸운 전쟁인지 모르는 아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믿기 어려운 소리긴 한데, 암튼 그들만의 잘못은 아닌 듯 하다. 전쟁의 기원과 양상이 하도 복잡해서 어른들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물어보면,
첨에는 남한과 북한이 싸웠고, 싸움 시작 15 일 뒤에는 미국과 북한이 싸웠으며, 넉 달 뒤에는 미국과 중국이 맞붙었는데, 곧바로 21 대 2 다구리 패싸움으로 확대됐다… 뭐 이렇게 대답해 주면 되겠다.
근데 언제나 중요한 것은 <왜> 이 전쟁이 일어났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는 거다.
문제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까지는 추적하기가 비교적 쉬운데 항상 <왜> 라는 육하원칙의 마지막 문제에 부딪히기만 하면 똥싼 놈마다 변명이 제 각각이라 헷갈리기 십상이다 . <왜>를 제대로 밝혀내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해야 할 점은,
전쟁에 대한 피상적 사실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여전히 전쟁기념관 여행기에 해당하지만 <왜 이 전쟁이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적 발언 범주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다.
o/ 앗싸라비야~~
어쨌든,
용산 전쟁기념관은......다른 나라의 왁스 뮤지엄에 비해 입체 조형물의 현실감이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전체적인 레이아웃이나 이동의 편리성은 우수한 편에 속했다.
M125A1 장갑차에 탑승해 보았다. 차내에서 방탄유리창을 통해 밖을 본 모습이다. 오른쪽 위에 있는 희미한 자국은 총탄자국이다.
해치를 열어보려고 했는데 열 수가 없었다. 포탑에 앉아보고 싶었는데...... -_-
군대에 다시 가게 되면 (다음 생에?) 수송기 조종사를 하고 싶다. 전투기는 무서우니까......
한국전쟁은 중국 국공내전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따라서 전쟁 발발 시점이 딱 언제다 라고 특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두 정부, 즉 대한민국 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군사적 전면전이 발발한 시점만을 그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 전쟁은 1950 년 6 월 25 일 오전 4 시 정각에 시작됐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날 새벽 북한의 <조선인민군 총사령부>는 <폭풍>이라는 작전암호명으로 38 선 전역에 걸쳐 전진 배치된 예하 15 개 사단에 남진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북한군은 옹진-개성-춘천-강릉 라인을 따라 일제히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전선에 배치된 자주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고, 곧이어 T34 전차를 주력으로 하는 기갑부대가 삼팔선을 넘어 남진하기 시작했다. 기갑부대 뒤로 보병사단이 따랐다.
전쟁 난민들이다. 겨울인 걸 보니 아마도 1.4 후퇴 당시 남쪽으로 이동하는 피난민들일 것이다.
1.4 후퇴가 뭐냐고?
1951 년 1 월 4 일 한국 정부가 두 번 째로 서울을 빼앗긴 사건을 말한다.
전쟁발발부터 1.4 후퇴까지의 전말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한-미 연합군이 북한군에게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낙동강까지 밀려나자 연합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의 대도박을 벌인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1950 년 9 월 15 일 미국군 해병 제 1 사단과 미국군 보병 제 7 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7 만 여 명의 상륙부대가 261 척의 함정에 나누어 타고 인천 근해에 집결했다.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전 11 일 간 인천시 전 지역과 경인가도 주변에 대한 무자비한 융단폭격이 단행됐다.
상륙작전은 가까스로 성공했다. 상륙에 성공한 미군은 월미도와 인천항에 상륙교두보를 확보하고 인천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조선인민군 제 18 사단과 지상전을 벌이며 서울을 향해 이동했다. 상륙지점에서 불과 30 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서울을 재점령하는데 무려 13 일이 소요될 만큼 한-미연합군의 서울 탈환 작전은 격렬하고도 처절했다.
천신만고 끝에 9 월 28 일 종앙청 국기게양대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끌어내리고 태극기를 다시 매달아 놓기는 했는데 불과 한 달도 안 돼 이번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조선전쟁인민지원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 <팽더화이>가 지휘하는 18 개 사단 38 만 명의 전투부대를 포함해 모두 45 만 명으로 편성된 대군을 한반도 전선에 내려 보냈다. 이 바람에 압록강 혜산진까지 진격했던 한미연합군은 혼비백산한 가운데 또다시 패주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평양-원산 라인을 장악한 조중연합군에 의해 퇴로가 가로막힌 한국군 제 1 군단과 미국군 제 10 군단 병력 10 만 여 명은 각종 차량 1 만 7 천 대와 약 35 만 톤에 달하는 보급물자를 일단 함경남도 흥남항으로 철수시켰다.
12 월 15 일부터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193 척의 각종 선박에는 약 10 만 명의 철수 군인들과 역시 10 만 여명에 달하는 민간인 피난민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히 들어찬 채 동해바다로 철수했다.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던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
부두에서 울부짖고 있는 피난민들과 새파랗게 겁에 질린 채 오돌오돌 떨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목격한 마지막 배의 선장이 결단을 내렸다. 배에 있는 모든 무기와 적재화물을 바다에 투하하고 대신 파난민들을 태우기로 한 것이다. 배에서는 선장이 왕이다. 선장의 결단에 미국군 제 10 군단장 육군 중장 아몬드 (Edward M. Almond) 는 아무 소리 못하고 선장의 명령에 따랐다.
드디어......
군인과 민간인 등 무려 1 만 4 천 여 명이 승선한 매러디스 빅토리 (SS Meredith Victory)호가 무적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하게 마지막으로 흥남항을 빠져나갔다. 이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세계 항해사상 가장 많은 수의 난민을 태운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함경남도 흥남에서 경상남도 장승포까지 가는 30 여 시간에 달하는 험하고도 머나 먼 항로는 가혹하기 짝이 없는 고생길이었다. 추위와 멀미, 굶주림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이 배가 항해하는 동안 다섯 명의 새 생명이 탄생하는 기적도 일어났다.
그 해 크리스마스 날 패잔병들과 전쟁난민들을 가득 실은 채 차가운 겨울 바다를 항해하던 배 안에서 탄생한 다섯 명의 아기들이 살아있다면 올해 모두 61 세다. <1950 년 12 월 25 일 생>이라는 제목의 전쟁영화는 왜 아직도 안 만들어진 걸까?
그러고 보니 이 날 탈출 피난선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태어난 이 다섯 명의 아기들...... 호랑이띠네~
띠동갑 형님들 sarnia 아우 인사 받으슈 !
참, 이 배에는 흥남항구 일대의 대혼란 속에서 어린 여동생을 잃어버리고 혼자 배를 타야 했던 <금순이 오빠>도 타고 있었을 것이다.
~~ 눈 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보았다~ 금순아 어데를 가서 길을 잃고 헤메었더냐~~ 쿵작쿵작
이듬해 인 1951 년 1 월 4 일 한미 연합군과 한국 정부는 서울을 다시 조중연합군에게 내주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이상이 1.4 후퇴 사건 전말의 요약이다.
민간인들은 왜 피난을 갔을까?
<북한 공산당>이 싫어서? 또는 반대로 <미제 잎잡이 이승만 도당>이 싫어서? 글쎄......
뭐 그런 사람들도 간혹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민간인들은 그저 다가오는 위험한 전선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본능때문에 살고 있던 보금자리를 버린 채 피난을 떠나야 했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을 지원한 나라는 전투부대를 파견한 16 개국과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한 5 개국을 포함해서 모두 21 개국 이다.
태국도 그 중 하나다. 당시 태국과 필리핀은 물론이고 동남아 대부분의 나라들이 대한민국에 비해 월등히 잘 살았던 나라들이었다. 대한민국은 그들로부터 기술지원은 물론이고 식량원조까지 받아야 할 형편이었다.
태국은 한국전쟁에 연인원 6326 명이 참전해서 130 명이 전사하고 1139 명이 부상당했다.
캐나다도 겉으로만 새색시처럼 얌전해 보일 뿐 해외전쟁이라면 빠지는 법이 없다. 딱 두 번, 베트남전과 이라크전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이 두 전쟁은 너무나도 말이 안 되는 부도덕한 전쟁이었는지라 미국의 요구에 캐나다 국민들과 정부가 분명하게 <NO> 했기 때문이다.
근데 참전키로 일단 마음먹은 전쟁에는 대규모 전투부대를 통크게 파견하는 게 이 나라 특징 같다.
한국전쟁에는 연인원 25687 명이 참전해서 516 명이 전사하고 1212 명이 부상당했다.
매년 11 월 11 일 (Remembrance Day)이 되면 지금은 90 줄에 들어선 당시의 참전용사 할아버지들과 캐나다 거주 한인들과의 만남의 광장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그 할아버지들이 한결같이 바라는 것은 한반도의 평화다. 무슨 보상이나 공치사 따위를 바란다거나 당시의 적이었던 중국이나 북한을 비난하는 법도 없다.
"내 친구를 죽인 건 누구도 아니었어요. 그냥...... 전쟁이었지요"
어느 참전용사 할아버지가 한 말이다.
전사통지서를 받은 아내와 딸이 울고 있다.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아내와 아빠를 잃은 딸의 비통한 마음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
항상 궁금했던 게 한 가지 있었다.
대단한 건 아니고 소박한 거다.
팽더화이가 왜 갑자기 이 전쟁에 참전을 결심한 걸까 하는 궁금함이었다. 그는 그 때 서북 군정위 주석이었다. 군에서 떠나 지방경제재건에 주력하던 그가 나름 행복과 평화가 보장되어 있는 그 자리를 내 던지고 <조선전쟁인민지원군사령관>이 되어 죽음의 한국전선으로 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몇 년 전에 그 궁금함을 풀 수 있는 이유의 단초를 하나 찾기는 했다.
1942 년 5 월 일본 제국육군 화북 방면군은 팔로군 중앙 지휘부 위치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를 확보하고 태항산의 팔로군 근거지를 포위 공격한 일이 있었다. 고립된 분지에서 불시에 포위를 당한 팔로군 주력은 폭격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에 의해 섬멸될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사실 사태전개의 추이에 따라 중국의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었던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이었다.
당시 이곳에는 팽더화이 자신 뿐 아니라 덩샤오핑 등 향후 중국을 이끌고 나갈 걸출한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 중요한 인물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가장 선두에서 일본군의 포위망을 돌파해서 이들이 죽음의 십자령을 무사히 빠져 나가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부대가 바로 조선의용군들이었다.
그 때 조선의용군을 지휘했던 인물 두 명이 윤세주와 진광화다. 윤세주와 진광화는 현장에서 최후를 맞았지만 그들이 장렬한 희생을 감수하며 일본군의 포위망을 뜷어 준 덕분에 팽더화이를 비롯한 중국지도부는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 지도부의 입장에서 윤세주와 진광화는 생명의 은인일 뿐 아니라 중국의 미래를 위기에서 구출해 준 영웅들인 셈이었다.
죽음 일보직전에서 중국 혁명 지도부의 목숨을 구해 준 조선인민의용군은 일본이 패망한 후 거의 모두 북한으로 가서 조선인민군 조직의 간부진영을 구성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후 서울을 가장 먼저 점령했던 인민군 제 6 사단은 일반 보병사단이 아니라 아예 부대원 거의 전부가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특수간부부대였다.
무엇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윤세주와 진광화의 친구들이 바로 당시의 북한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중국이, 정치적인 이유를 떠나 인간적인 의리상으로도 북한의 위기를 외면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짐작을 해 본다.
팽더화이가 스스로 그토록 보람 있어 하던 새 자리를 내팽개치고 인민지원군사령관을 자청한 것이나, 국가주석 마오쩌뚱이 자기 큰 아들 마오안잉이 이 위험한 전쟁에 자기를 보내 줄 것을 간청했을 때 기꺼이 보내 준 것은 <정치적 이유> 이상의 <인간적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오안잉은 한국전선으로 나간 지 불과 한 달만인 1950 년 11 월 25 일 평안북도의 산악지역에서 미군폭격기의 네이팜탄 공격을 받고 죽음을 당했다. 중국군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복경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다른 인민들의 자식들 시신은 다 그곳에 있는데......> 라며 마오쩌뚱 스스로 한사코 반대하는 바람에 마오안잉의 시신은 아직도 평안북도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외국인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고 한다.
사진은 펌
마오쩌뚱의 큰 아들 마오안잉과 그의 부인 류숭린
그는 여덟 살 때 어머니 양카이휘가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의해 처형당하는 크나 큰 슬픔을 겪기도 했다.
중국만이 아니다. 미국도 만만치 않다.
이 여행기를 쓰면서, 한국전쟁 중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이젠아워의 아들을 비롯해 미국군 현역 장성의 자녀 142 명이 참전하여 35 명이 전사하거나 불구를 수반하는 부상을 당했다는 기록을 새로 접하고 약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유엔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아들 주니어 밴플리트가 공군 전투기 조종사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실종된 사건이다. 아직 시체도 찾지 못했다. 밴플리트 스스로 과도한 수색작업으로 병력을 낭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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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글 쓰다 보니 이런 걸 깨달았다.
<죄든 우든>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회색분자>가 되는 건 쉬운 일인데.
<좌와 우를> 둘 다 끌어 안아보려고 <중용> 흉내를 내는 건 졸라 어렵다는 것을……
ㅎㅎ, 이건 농담이고,
암튼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고 표현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이번 한국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좋은 시간들을 보냈다 ^^
그나저나 저 두 사람은 곧 뽀뽀를 할 모양이다. 전쟁기념관은 어느 비극영화보다도 감성적 충격을 줄 수 있는 입체공간이다.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가슴만 있다면 말이다.
저 커플은 제대로 보고 느낀 걸까? 그래서 감정이 복받쳐 올라 새삼스럽게 서로 뽀뽀를 하려고??
기왕이면 가운데 원 안으로 들어가 내 사진의 구도를 빛내는 감각과 배려를 발휘해 주길 기대했건만...... 끝내 그런 장면은 잡지 못했다.
앞에 보이는 건물이 국방부 청사다. 나보다 한 살 많은 당조카의 딸이 국방부 의장대에 근무했는데, 아직 같은 곳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sarnia 님은 할아버지다 ! 그것도 무려 스물 다섯 살 짜리 당손녀를 둔......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