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진화론적 심리학자가 쓴 글입니다. 저는 진화론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귀동냥하는 정도입니다. 이 게시판에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진화론을 제대로 깊이 이해하시는 한분이 계십니다. 얼마전 어떤 분이 적자생존의 진화론을 들고 나오셨는데, 아래 글 보면 다윈의 진화론적 이해를 제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도킨스의 진화론의 개략입니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표현이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도킨스도 철회한다고 했군요. 다른 진화론자들도 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과학적 발견물이나 사실, 그리고 이론도 불가피하게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때론 은유적인 표현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찬반논쟁이 일어는 경우가 많죠.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명확한 용어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여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대는 학문이 더욱 더 분업화되고 세분화되어서 동일한 단어가 분야를 건너뛰면 전혀 다르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서로 제대로 소통이 안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자가 사회학적 자료를 사용하는데 매우 신중해하고 철학자가 과학자들의 개념과 이론들을 사용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도 있습니다.
사족: //언젠가 토마님께서 Sokal의 [Intellectual Impostures]를 소개해 주셨는데, 이 책은 철학자나 기호학자들을 까는 책입니다. 같은 내용인데 제목을 달리 하여 [Fashionable Nonsense: Postmodern Intellectuals' Abuse of Science] 라고 나왔네요. 전자를 사두고 읽어보지 못했는데 후자를 며칠전 구했는데 알고 보니 같은 책이군요. 다는 못읽고 제가 좋아했던 자끄 라깡, 쥴리아 크리스테바, 쟝 보드리야르 항목만 읽어봐야겠습니다.//
개념적 모호성에 대해서는 멀리 갈 필요없이 cult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문화인류학자가 쓰던 용어로 종교적인 제의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다가 북미에서 기독교 이단사냥꾼들(heresy hunters)들이 "이단"(heresy)이라는 단어의 약빨이 다하자 이른바 이단종파들을 cults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아래 클립보드님이 언급하신 뉴에이지도 이단사냥꾼들은 컬트라고 부르죠. 그리고 이러한 이단 사냥꾼들을 학자들은 anti-cultists라고 부릅니다.
이 cult라는 단어가 여기에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흔히 듣는 컬트 영화(cult movies)는 종교적인 단어가 아니라 어떤 특정 영화를 두고 매니아 층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 영화가 그렇게 좋은 영화가 아니라도 그렇죠.
저는 잘은 모르지만, 하나의 개념이 제대로 사용되려면 그 개념은 배타적인 정의가 확실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개념과 개념사이의 배타성을 분명히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야 그 개념이 한정하는 경계가 분명해지니까요. 아주 쉽게는 우리가 나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나무가 돌이 아니며, 시냇물이 아니며, 산이 아니며, 해나 달이 아님을 잘 압니다. 이럴 경우 아무런 혼돈을 일으키지 않지만 사랑이나 평화등 추상적인 개념일수록 정의(working definition)가 명확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혼돈을 일으키는 것이죠.
여기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종북주의"라는 말도 정의가 불문명하기 때문에 자기 의견이 반대되는 좀 비평적인 사람들을 휘몰아치기 쉬운 무기로 사용되는 것이죠. 이것은 보통 무지막지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편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반론을 제기하면, "아니면 말고"라고 하면서 "휘리릭~" 사라지면 그만이죠. 그렇게 낙인찍힌 사람의 기분은 별로겠죠.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New Age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원래 그냥 새로운 시대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 종교현상을 지칭하는 단어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이 단어가 워낙 광범위하게 사용되니까 제도종교가 아닌 모든 종교현상을 뉴에이지라고 이단 사냥꾼들은 부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단중에 가장 무서운 이단이 뉴에이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뉴에이지 현상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정의나 유형화시키는 것을 어려워하니까요.
*위의 Doug Groothuis은 뉴에이지 이단 사냥의 대표적인 인간이죠.
그렇다 보니까 일반대중들에게 뉴에이지를 실체없는 음모이론으로 포장하기 쉬우니까요. 원래 그냥 퍼오려다가 몇 마디 했습니다. -내사랑아프리카 올림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어떤 독자는 책을 읽고 괴로운 나머지 사흘 동안 밤잠을 설쳤다. 그런 책을 쓰고서 어떻게 아침마다 태연하게 일어날 수 있느냐고 저자에게 묻는 이도 있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1976년에 내놓은 <이기적 유전자> 말이다. 이 책은 20년 전 국내에 번역된 이래 과학분야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꾸준히 지키고 있다. 우리 사회에도 이 책을, 정확히 말하면 책 제목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이 분야를 전공하다 보니, 인간이 이기적 유전자가 조종하는 로봇에 불과하다는 말은 헛소리 아니냐고 날 선 질문을 퍼붓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일반인들은 ‘이기적 유전자’를 대개 이렇게 이해한다. 유전자는 이기적이어서 다음 세대에 더 많이 전파되려 애쓴다. 인간은 유전자가 이 목표를 이루고자 만들어낸 로봇이다. 따라서 인간은 본래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이 이론에 따르면 자식이나 배우자, 친구 등을 향한 따뜻한 사랑과 희생도 진정한 이타성이 아니라 유전자가 자기 복제본을 남기려는 이기적 책략에 불과하다고 한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라는 해석은 책의 제1장에 나오는 문장으로 뒷받침된다. “관용과 이타성을 가르치도록 노력하자. 왜냐하면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좋은 소식이 있다. 이러한 해석은 틀렸다.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먼저 도킨스는 책에서 ‘이기적인 유전자’는 단순한 은유에 불과함을 지겨울 정도로 강조하고 있음을 짚어 두기로 하자. 유전자가 마치 사람처럼 의도를 지닐 수 있다고 도킨스가 착각하고 있다며 비판하는 사람은 과녁을 크게 벗어난 셈이다. 그렇다면 이 은유는 대체 무슨 뜻일까?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말은 자연선택에 의해 다음 세대에 후손을 더 많이 남기는 단위는 개체나 집단이 아니라 유전자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유전자가 마치 자기 후손을 널리 퍼뜨리려 노력하는 실체인 양 가정하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게 도킨스의 제안이다. 예를 들어, 우리 몸은 추우면 덜덜 떨어서 열을 만들어 체온을 유지한다. 추우면 몸을 떨게 했던 유전자가 다른 대립유전자, 이를테면 아무리 추워도 평정을 유지하게 했던 유전자보다 다음 세대에 더 널리 퍼질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추우면 몸을 덜덜 떨게 하는 행동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이기적’이다. 오늘날 생명체의 복잡한 적응을 만드는 모든 유전자들은 먼 과거에 그 복제본을 퍼뜨리기에 유리했다는 의미에서 ‘이기적’이다.
유전자의 눈높이에서 진화를 바라보는 이론은, 흔한 오해와 달리, 모든 사람의 궁극적인 목표는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함임을 설파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유전자를 퍼뜨리려 애쓰지 않는다. 유전자의 선택 과정을 어떤 식으로 은유하든지 우리 인간은 사랑, 안전, 행복, 우정 같은 진짜 목표를 지닌다. 즉, 학자들이 이기적이라고 은유하는 유전자가 반드시 이기적인 개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종종 유전자가 행하는 가장 ‘이기적인’ 일은 진정으로 이타적인 행동을 만드는 심리적 적응을 설계하는 것이다. 자식, 배우자, 혹은 친구에 대한 사랑은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참으로 숭고하고 이타적인 희생일 수 있다. 생물학자들이 사랑이라는 심리적 적응을 포함하여 그 모든 적응들을 만드는 유전자들을 이기적이라 은유한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말이다.
우리가 이기적으로 태어났다는 구절은 어떡할 것인가? 도킨스는 2006년에 새로 덧붙인 서문에서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났다”는 문장은 틀렸으니 마음속에서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행이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