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문제가 자주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해서 시인 단테에 대한 것을 소개합니다. 최근에 EBS 인문학 강좌 중 하나인 이탈리아 문학 전문가 부산 외대 박상진 교수의 "구원의 시인 단테"는 중세시대와 르네상스로 잇는 단테의 [신곡]을 설명하는 명강의입니다. 과거는 인간의 경험의 역사이고 그 당시의 맥락에서 봐야 하며 (what it meant to them) 그리고 나서 나의 시각을 보태야지 (what it means to us) 단칼로 부정하면 더 이상의 대화는 안됩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과거를 존중해야 하며 정확한 이해는 필수겠죠.
위의 두 링크의 동영상을 보면, 단테가 신곡을 통해서 어떻게 연옥을 시적 상상력으로 구현해 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테의 사람됨도 엿볼 수 있구요. 이것은 유투브를 통해서도 볼 수 있구요. 단테는 피렌체(플로렌스) 사람이지만 정치에 연류되어 영구 추방되었지만 자신의 언어 이탈리아어를 통해서 위대한 서사시를 구현해 냈다고 박상진 교수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사이면서 연세대 신학대 교수인 김상근 교수는 르네상스 문화 전문가로 피렌체만 수십번 다녀 오신 분이고 여러 강좌를 통해서 단순한 교회사를 문화사의 위치로 끌어 올리고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킨 분입니다. 여기서 그는 호머-베르길리우스-단테에 이르는 서구 문명사의 위대한 시인들의 계보를 설명하면서 단테가 갖는 중요성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위의 동영상은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베아트리체라는 한 여인을 사랑한 단테가 위대한 신곡을 쓴 경험을 간명하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테가 단 두번 스쳐지나 가듯 만난 여인 베아트리체, 하지만 그녀는 결혼을 하지만 요절합니다. 단테는 그 여인 베아트리체를 평생 가슴에 묻고 그 시적 삶의 대장정을 합니다.
김상근 교수가 소개한 이 그림에 보면, 단테의 시선은 베아트리체를 향하고 있지만, 베아트리체는 앞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한 모습이구요.
저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분들의 강좌도 있지만, 단테 문학의 문화적 영향, 즉 영향사에 대한 것입니다. Jon M. Sweeney는 [Inventing Hell: Dante, the Bible, and Eternal Torment]라는 책을 통해서 단테가 그리스, 로마신화, 성서, 이슬람 등등에서 자신이 당시 수집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소화해서 지옥을 자신의 경험으로 소화해서 위대한 문학을 구축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위니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믿는 지옥관은 성서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단테의 영향을 가장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Dante is the one who made eternal punishment exotic and real, as well as Christian." 베르길리우스는 호머가 마침표를 찍은 것에서 출발해서 새로운 여정을 하고, 단테는 베르길리우스가 마침표를 찍은 것에서 자신의 연옥지옥천국 경험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서양 문명의 위대한 세 문학가들의 대장정 또는 계보(genealogy)입니다.
이러한 문학적 상상의 산물을 real하게 경험하는 사람도 있고, 단지 문학적 허구로 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문학과 종교의 거리가 멀기도 하고 가깝다는 것을 단테는 보여주고 있다고 보구요. 이런 다이제스트로도 서양문화사의 한 단면을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단테의 문학적 상상력의 스승으로 예수가 아닌 베르길리우스(Vergilius; Virgil)였다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르네상스의 문을 연 사람, 그가 바로 단테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배타적입니다. 이야기가 배타적이지 않으면, 기승전결도 없고 플롯간의 긴장도 줄어듭니다. proponents가 있으면, opponents가 있기 마련이죠. 이야기에는 주인공이 있고 스포팅 하는 인물도 존재하죠. OZ님의 말씀은 일리가 있습니다. 영화 스타워즈에 별전이 있고 반지의 제왕에도 호빗 이야기가 따로 있고, 또는 스타워즈의 4-5-6이 이전으로 되돌아가듯이, 하나의 이야기가 새로 시작되려면 주인공은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OZ님이 결혼한 남성이라면, 두분의 결혼 이야기는 주고 다른 사람들은 다 들러리가 되죠. 그 들러리는 사실 또 다른 사랑의 꽃을 피우는데 말이죠. 단테의 부인도 불행했고 청마 유치환의 부인도 불행했습니다. 어제 밤에 유투브에서 "혼자만의 사랑"이라는 노래를 들었는데, 결국 짝사랑이죠. 단테를 바라보는 저 여인이 혹시 단테와 결혼한 여자라고 상상해도 좋을 듯하군요. 평생 단테만 바라보지만, 단테의 마음은 영원히 베아테리체만 품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불행한 이 여인들도 단테와 청마를 바라보는 그 사실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찾았는지 모르죠. 그러면 그들은 드라마의 새 주인공들입니다. 기독교 여성신학은 항상 엑스트라 역할을 해온 성서속의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보고 재건해 보자는 노력도 포함된 것이죠. 가정이 행복하려면 부부간의 사랑은 배타적이어야 합니다. 오직 남편과 아내만 주인공이어야지 다른 객이 들어오면 삼각관계, 사각관계가 형성되고 갈등이 증폭되며, 결국 파국으로 나갑니다.
좀 빗나갔지만, 성서, 특히 창세기는 신화적 구조 또는 이야기로 되어 있는데 그 이야기의 메인 주제를 벗어나 시비를 걸면 무한하게 전개 되어버립니다. 아담과 이브가 낳은 자식은 가인과 아벨밖에 없는데,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데도 가인은 자신도 다른 족속에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논리적 모순이죠. 창세기 이야기는 원래 편집된 것이고 그렇다보니 편집자가 일관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뚫고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외계인을 믿는 라엘리안들은 성서속의 생명의 나무는 우주인들의 과학적 지식이고 아담과 이브는 우주인들의 과학적 지식을 훔치려 했다는 것이죠. 조금 전문적인 이야기지만, 서울에서 라엘리안 모임에 참석했는데 어느 감리교 신학교에 다니는 라엘리언이 저한테 불트만의 "탈신화화"를 아느냐고 묻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불트만의 탈신화화는 성서의 신화적 요소를 걷어내고 현대인간의 과학적 세계관에서 그것을 실존적으로 해석하자는 것인데, 그의 주장은 성서의 신화 이야기를 걷어내면 사실 성서는 외계인들의 과학의 지식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성서의 주인공은 아담과 이브가 아니라 외계인들이 됩니다. 라엘리언들이 탈신화화라는 전문적인 성서연구방법을 이렇게도 사용하는구나. 참 인상적인 만남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