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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퍼온글) 종교간의 대화에서 지켜야 할 규칙 9가지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8825 작성일 2016-02-10 11:32 조회수 2141
오강남 선생님이 주관하는 '종교 너머 아하! 경계 너머 아하!' (www.njn.kr)에서 퍼왔습니다. 이 웹사이트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 정치적 사상이 서로 다르더라도 건전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씨엔드림의 자유게시판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소개합니다. 

각 개체들이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홀로 살 수 없는 것이 우주의 법칙입니다. 진보이든 보수이든, 남한이이든 북한이든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세상은 평화롭고 윤택해집니다.  



최근에 작고한 세계적 비교종교학자 라이몬 파니카(Raimon Panikkar, 1918 ~2010) 박사.   (경계너머 아하 고문으로 있는 노영찬 박사의 지도교수이기도 하다.)


그는 스페인 바셀로나에서 가톨릭 어머니와 힌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가톨릭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대학에서는 화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철학박사화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로마에 있는 Pontifical Lateran University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샹카라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생애 후반부에 이르러 하버드 대학교 신학부 방문교수로 초청된 후 여러 해를 미국 산타 바바라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C Santa Barbara)에서 가르쳤다그는40권의 책과 900 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가 가톨릭 신부로서 인도에 가서 바나라스 힌두 대학(Banaras Hindu University)에서 인도 철학을 공부하면서 힌두교인이 되고 다시 불교를 공부하면서 불교인이 되었다그는 나중 그의 경험을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유럽을 떠났고, (인도에서내가 힌두 교인임을 발견하게 되었고, (유럽으로돌아올 때는 불교인이 되어 있었는데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 되기를 그친 일이 없었다.”


파니카는 현재 그리스도교가 활력을 잃고 쇠퇴해 가는데이를 멈추게 하는 길은 이웃 종교와의 이종교배와 상호 수태(cross-fertilization and mutual fecundation)를 통해서그리고 현재의 문화적 철학적 경계를 넘어 섬으로만 창조성과 역동성을 회복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요즘 말로 고치면 자기 종교만 진리를 다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이웃 종교를 정죄하거나 배척하는 배타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역사적으로 검증된 종교 전통들 중에서 필요한 요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끌어안고 받아들여 이를 체화해야 한다는 뜻이다그는 자신의 생각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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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하는  종교간의 대화에서 지켜야 할 규칙 아홉가지.

대략적인 골자를 한국어로 옮겨봅니다.

The Religious Encounter: Rules of the Game

 

Panikkar's primary principle for religious encounter is that it must be a truly religious experience. He develops this with respect to a number of subsidiary principles.

 

1. It must be free from particular apologetics. The Christian, Hindu or Buddhist must not approach the dialogue with the a priori idea of defending one's own tradition over or against the other. 
특정한 호교론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한다.  자기 전통을 방어하려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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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It must be free from general apologetics. Those involved in interfaith dialogue should not see their task in terms of defending religion in general against the non-religious or anti-religious attitudes of secular society. This would turn the religious encounter into an ideological movement as well being simplistic in its rejection of modern secular consciousness.
일반적인 호교론으로부터도 자유스러워야 한다.  무종교나 반종교적 태도로부터 종교 일반을 방어하려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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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One must face the challenge of conversion. To be involved in religious encounter is a challenge and a risk. The truly religious person is not a fanatic who has all the answers but a pilgrim who is always open to the experience of grace and truth. One may lose one's life or even lose faith in one's own tradition--but one may also be born again and one's own tradition transformed.
자기가 모든 해답을 다 가지고 있다는 광신자가 되지 말고 진리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하고 심지어 개종할 수도 있다는 각오로 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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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e historical dimension is necessary but not sufficient. All religions risk limiting themselves to particular, historical interpretations which quickly become truncated ideologies. Religious encounter is a meeting of religious persons who both carry the power and burden of their own religious traditions; yet they also carry the power and burden of reinterpreting that tradition anew, not breaking with past history, but carrying it forward in imaginative ways. Religious persons like all others belong to history; they also change history through responding to life's contemporary challenges.
역사적 차원은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못하다. 자기 전통도 지금의 도전에 응답할 수 있도록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힘과 부담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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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It is not just a congress of philosophy. Religious encounter is a meeting of persons, not simply the meeting of minds. This does not deny the place of philosophy including the possible comparison of various religious systems. Nonetheless, doctrinal comparisons must be genuinely dialogical, that is, taking into account the reality of profoundly diverse worldviews. Much damage has been done by well intentioned western scholars who assume that only western philosophy has appropriate categories for understanding the world's religions. If anything, eastern philosophy has a more sophisticated system for appropriating religious truth.
종교적 대화는 단순히 철학 대회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격의 만남이지 지성의 만남이 아니다. 서양 철학만 아니라 동양 철학도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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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It is not only a theological symposium. Theologians have an important role, but religious encounter is not primarily concerned with theological systems of thought. Theologies emanate from a particular experience, revelation or event that is ipso facto specific to the particular religious tradition in question. Theologies are primarily concerned with religious beliefs; religious encounter is concerned with religious persons in their entirety. The meeting of persons is not at the level of belief, but at the level of faith in a truth that transcends beliefs, doctrines and theological systems.
종교적 대화는 단순히 신학 심포지움만이 아니다.  신학은 신념체계에 관한 것이지만 종교적 대화는 종교적 인간 전체에 관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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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It is not merely an ecclesiastical endeavour. Admitting that official encounter among representatives of the world's religious traditions is today an inescapable duty, these must be seen as separate to and independent of the religious encounter of ordinary religious believers. The former will be primarily concerned, as they must, with the preservation of their own traditions in a religiously pluralistic world. The latter will be freer to try new ways and risk new solutions . . . and to be genuinely open to the multireligious experience.
그것은 단순히 교회 지도자들의 노력만이 아니다.  평신도들도 참여해야.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전통을 유지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으나 평신도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데 더 자유스러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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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It is a religious encounter in faith, hope and love. Whereas beliefs, ideologies, doctrines and theologies divide, faith unites. Hope is at once a truly human and a profoundly religious attitude, often linked to the religious notion of sacrifice: one's eschatological hope for the world andourselves enters the heart of the dialogue overriding fear, weakness and prejudice. Love seeks truth, but it also impels us toward our fellow human beings, leading us to discover in them what is lacking in us. In faith, hope and love, one yearns for the common recognition of truth that does not obliterate the differences or mute the voices of any tradition.
종교적 대화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이다. 신념체계나 이데올로기나 교리나 신학은 갈라놓는 경향이 있지만 신앙은 하나로 묶는 힘이 있다. 소망과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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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The primacy of intra-religious dialogue. Before entering into an inter-religious dialogue, one must first depth the reality of one's own tradition. This is to say that intra-religious dialogue is primary.
자기 종교 내에서의 대화가 먼저다.  이웃 종교와의 대화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자기 종교 전통의 실상을 깊이 알아야 한다.  자기 종교 내에서의 대화가 우선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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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LIP  |  2016-02-10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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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간의 대화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아예 처음부터 대화를 하지 않는 것. 대화는 소통을 전제로 하지만, 종교에 관한 대화는 상대방의 종교를 바꾸려는 의도가 전제되므로.....
종교를 검증할 수 있는 도구가 있는가요? 창조론또는 진화론이 가설을 넘어서 진리나 법칙이 될수 있나요?
자신이 깨달고 내린 결론으로 상대방도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나 주장은 또다른 유형의 무력시위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그만하였으면 좋겠습니다. ^^

내사랑아프리카  |  2016-02-10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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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정보 관련 댓글 답니다.

1980년대와 90년대 초에 종교간의 대화의 열풍이 일어났었죠. 저도 그런 열풍에 휩싸였었고, 레이먼 파니카, 존 힉, 폴 니터는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었습니다. 이런 신학자들의 군에서 살짝 벗어나 종교학에 양다리를 걸친 신화학자 조셉 캡벨, [The World's Religions]라는 책을 써서 대 히트를 친 휴스턴 스미쓰, 요즘 인기 있는 캐런 암스트롱 등은 "모든 종교는 하나다"(All religions are one)라는 깃발아래 야심찬 열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소박한 열망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그런 열풍, 주로 신학적 엘리트들이 추구한 열풍은 식고 각 종교의 현상 자체에 대한 이해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런 분들은 어쩌면 세계 종교에서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 시대의 로맨티스트들이었습니다. 오강남 선생도 제 소박한 생각에 우리 시대의 로맨티스트라고 봅니다. 이런 로맨티스트적 추구는 저는 새로운 형태의 신학운동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간의 대화의 문제는 신학자들의 이념적 추구 이전에 세계가 지구화 되어 가고, 각 사회는 다문화화 되어가므로 대화를 하지 않을려고 해도 그냥 하게 됩니다. 이런 다문화적 사회에서 종교가 변해가는 지형 그리고 그 상화작용을 목도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늘봄  |  2016-02-11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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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간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을 나의 종교로 개종하려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종교간의 대화가 필요한 것은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환영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화는 온 인류의 평화를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대로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종교간의 대화가 아닙니다.

보수이든 진보이든 나의 신학과 신앙만이 유일하게 진실하고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말은 더 이상 효력이 없습니다.

종교간의 대화는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사람답게 공평한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길을 탐구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화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6-02-1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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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TULIP님께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이상적인 대화란 없다는 것입니다.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이론이 나오면 지식을 경쟁할 수 밖에 없고 이론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은 이론은 사실 대우를 받고 그렇지 못한 이론은 도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정치에서도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정당은 수권정당이 될 수 없으며, 군소 정당으로 전락하거나 소멸되는 것은 자연스런 이칩니다.

종교도 이런 정치집단이나 학계와 다르지 못합니다. 모든 종교는 지식사회학에서 보면, 사회적 구성(social construction)이고 그러한 사회적 구성에서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쟁 사회에서도 한 종교가 독점하거나 정치와 결탁해서 폭력을 휘두르거나 권력을 행사하기 보다는 선의의 경쟁을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정치에서도 선전선동이 있듯이 종교도 선전선동, 다시 말해서 선교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대중 사회에서 진화론을 선전하든 창조론을 선전하든 자유며, 그런 선전선동에서 진화론은 엘리트 집단의 주류문화를 형성하며, 창조론은 하위문화를 형성할 뿐입니다.

저는 그러므로 기독교의 선교활동이나 이슬람의 선교활동이나 선교를 막을 수 없다고 보며, 개종활동(proselytizing)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봅니다. 여기 게시판에서도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자기 지식, 이념 등에 대해서 열심히 선전선동 또는 선교활동을 하고 있죠.

특히 다문화사회에서 선전선동은 다른 집단을 상당히 의식해야 하며, 그런 의식을 우리는 다문화적 의식이라고 합니다. 이런 다문화적 의식속에서 타문화에 대한 존중은 기본이자 예의입니다. 모든 인간은 종교, 정치, 인종, 지역적 차이를 넘어 동등하게 대접하고 대접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어떤 형태든 주류문화와 비주류문화의 형성은 불가피한 현상입니다. 하지만, 아담 스미스적 자유방임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캐나다 사회에서 소수민족, 성적 소수자에 대한 배려는 바로 인간 경쟁의 자유방임을 보완하는 것이라고 보구요.

*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이슬람이든, 힌두교든, 기독교든 진보적인 종교는 꼭지점에 이르면 쇠퇴의 길에 이르고 집단적 결집이 강한 공동체는 얼마동안 성장하다가 주류집단이 되며, 한계에 이르면 또 하강하게 마련입니다. 캐나다 연합교회가 그렇고 미국의 감리교, 장로교, 회중교가 그렇고, 유럽의 국가 종교인 기독교는 아사 직전에 있고, Global South에 해당되는 기독교는 급성장을 합니다. 미국의 예로 보자면, 자기 집단적 경계가 강한 보수기독교는 성장하고, 그렇지 못한 진보적 교회는 급하강합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맞는 것이며, fact이기도 합니다. 힌두교도 신에 대한 devotion이 강한 집단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으며, 아시아의 소승불교는 철학적이라기 보다는 주술적 대중적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 종교 현상, 다시 말해서 철학적인 엘리트 집단은 어느 종교에서도 존재하며, 이들은 소수지만 지식 생산자로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 외에 대중은 주요 지식생산자는 아니지만 종교가 대중문화로서 social presence를 강하게 해 주는 동력입니다. 보통 종교 엘리트들은 이런 사회적 현실을 무시하고 종교의 활력에 대해서 논하는데 이런 대중적 동력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종교철학적 엘리티즘에 빠지는 경향이 아주 농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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