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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읽지 않는 은유적 반란
작성자 안희선     게시물번호 -2092 작성일 2005-11-14 11:25 조회수 1146

산뜻하지 못한 시를 써 놓고나서,

또 한번 냄새 고약한 똥을 싼 것 같았는데...

그래도, 너그럽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짓도 이제 그만해야지...하면서도,

습관처럼 끄적거립니다.

 

뭐, 꼭이 달리 하고 싶은 일도 없지만요. (웃음)

 

 

늘, 건안하실 것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김창한 님께서 남기신 글


아래 글은 저 밑에 안희선 님께서 쓰신 "시는 똥이다"에 대해서 쓴 저의 감상문에 덧붙인 글입니다.
 
은유적 반란
-김창한

1. 시적 감성의 무딤
시를 읽다 보면, 아주 단순한 시어라도 이해하기가 힘들 때가 참 많습니다. 저 같은 산문주의자의 글이야 그것에 비하면 아주 쉽지요. 산문이 어려울 때는 주로 그 산문을 쓴 사람의 생각이 제대로 정리가 안되어 횡설수설 하다 보니 그럴 수 있고, 읽는 사람이 그 산문의 개념적 관계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시적 언어는 논리적 사고를 요청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고 비약하고 초월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시적 직관에 사는 시인은 늘 외롭고 시대의 아방가르드적인 역할을 할 경우가 많습니다.

2. A=B의 등식은 반란의 도구
다양한 은유적 형태를 놓고 볼 때 (이 말도 은유입니다. 형태를 어느 장소에 놓는 것으로 간주해서), A는 B다라는 은유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은유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단순성이 오히려 기존의 생각을 깨뜨리는 반란적 형태를 담고 있습니다. 안희선 시인님이 시는 똥이다는 본인이 의도했든 안했든 상당히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는 언어가 주는 사회성 때문입니다.

모든 언어에는 그 단어를 사용하는 언어 사용 주체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그의 언어 사용을 통제하는 사회적 규약이 있습니다. 날마다 포르노 잡지나 동영상을 받아 보고 여자를 만나면 섹스의 대상으로 보는 강간자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개념과 이른바 문학 소녀가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이나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또는 헤르만 헤세의 “페트 카멘찐트”를 보면서 사랑을 꿈꾸는 것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겠지요. 그리고 이러한 극단의 사례를 통제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언어가 주는 사회성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의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문학소녀와 강간범죄자를 이을 수 있는 경험적 공통성이 있으야만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양자간에 의미작용은 일어날 수는 있지만, 소통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안희선 시인님이 “시는 똥이다”라는 은유도 저는 이런 맥락에서 읽습니다. “시”라는 개념과 “똥”이라는 개념이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사회 통념상 없습니다. 일반 사람이 시는 똥이다라고 하면, 좀 돈 사람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통념을 깨고 시인이 시는 똥이다라고 하면서 시를 썼다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시=고상함, 언어, 순수, 정화, 성찰, 지성, 생산
똥=더러움, 냄새, 역겨움, 무가치함, 저등한 것, 배설

그런데 여기서 시=똥이라는 등식을 만들 때, 다양한 의미작용 (signification)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고상함은 더러움이다. 언어는 똥이다, 성찰은 무가치함이다. 언어는 저등한 것이다 등등. 수많은 의미작용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은유를 자신의 맥락에서 읽는 사람은 독자입니다. 시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해 본 사람이 시는 똥이다라고 말하면, 이것은 교통 표지판보다 못한 기호입니다. 교통 표지판이야 STOP 사인이 있으면 차가 멈추는 큰 기능을 하는데 시는 똥이다고 했으니 이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3. 독자의 지평과 수용
그러면 왜 안 시인께서 시는 똥이다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본인이 아니면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이 시가 저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까요? 답이 없습니다. 그냥 그 시를 보고 제가 좋다고 생각한 것뿐입니다. 시를 좋다 나쁘다 평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지요. 어떤 사람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삶의 깊은 본질을 묻는 성찰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왜 이 시를 좋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지평 (horizon; 수평선이든 알 바 아님) 입니다. 지평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듯이 제 시각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시인의 지평이 저의 지평과 만날 때 의도치 않은 의미작용 (또는 감흥 signification)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글 읽기의 즐거움입니다.

제가 이 시를 읽은 것은 이렇습니다.

안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시인이라고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인의 시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자신을 identify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시를 읽는 사람이 아닌, 시 생산자가 “시는 똥이다”고 했을 때는 심각해집니다. 이것은 시에 대한 반성입니다. 이것을 시에 대한 반성으로 한정하거나 삶 자체에 대한 근원적 반성으로 나아가거나 하는 것은 독자의 몫입니다.

이것은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에서 도대체 님은 무엇이냐 묻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님이 나와 하룻밤 자고 떠난 여인으로 읽히는 은유가 가장 직접적인 해석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님을 조국 (나라를 빼앗긴 체 망국을 설움을 노래한 민족주의자 한용운) 또는 이 님을 궁극적 깨달음 (한용인 선생이 스님이셨으니)이라는 고도의 상징적 언어로 발전해 갑니다. 단순히 사용하는 경칭인 님이 조국, 진리 등의 상징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은유가 주는 힘입니다. 이렇게 님에 대한 해석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시험 모범답안처럼 굳어지면, 이것은 상투어 (cliche)가 됩니다.

이러한 언어의 상징성은 우리가 흠모해야 하지만 경계해야 합니다. 어느 선사께서 그랬습니다. “부처는 똥 막대기다.” 옛날 중국에 똥막대기를 똥딱지로 썼다던데, 부처가 똥막대기라 했습니다. 이것이 부처모독입니까? 이 선사는 부처라는 상징이 너무나 일상화되어서 오히려 구도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해서 이런 은유를 사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동안 부처는 득도한 자의 상징으로 굳어져서 부처가 저기 서 있는 돌처럼 대상적 존재로 전락함을 직시하고 부처는 똥막대기라 했습니다.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했을 때, 이런 동어 반복은 글자 그대로 보면, 우리에게 전혀 감흥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크크 웃기는 소리 작작해라라고 핀잔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산속에 오래 파묻혀 지내더니만, 산과 물도 제대로 못 보는 모양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도대체 정보조차 주지 못합니다. 부처는 똥막대기다는 말은 그래도 말장난이라도 되지만, 이건 유치해서 차마 듣기조차 싫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홍길동은 홍길동이다, 똥은 똥이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자주의자들에 이것은 잡설이고 쓰레기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많은 논란을 일으킨 법어가 어디 있었습니까?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요, 이름을 이름이라고 하면 이름이 아니라도. 이 또한 뜬구름 잡는 소리입니다.

아냐, 앞의 道하고 뒤의 道는 달라. 그래? 뭐가 다른데?
………………………….

다시 안시인님의 똥으로 돌아갑니다. 이 시에서 시는 똥이다고 했을 때, 시를 생산하는 시인이 시를 똥이라고 한 것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 두 연을 보세요. 자조적인 한탄이 보입니다.

****************************
시, 아름답지요.
아니, 시는 정작 그 자신 별로 관심도 없는데
흔히 사람들이 말하길 시가 그렇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꼭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지요.
적어도 이 세상의 가식적인
기준을 떠나 바라 보자면,
******************************

어쩌면 이러한 자조는 세상을 향한 한탄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를 건성으로, 그냥 보기 좋은 언어적 배열로 생각합니다. 시 하나를 탄생시키는 시인의 고뇌는 온데 간데없고 그냥 그저 스쳐 지나가는 언어적 낙엽으로 시는 읽힙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조는 마지막 네 연에서 한탄에서 시인 자신으로 향합니다.
**************************
그런데, 나는 오늘도
냄새 고약한 질 나쁜 똥만 싸네요.

한때는, 내 똥 냄새도
제법 구수하다고 느낀 적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좋은 시인은 아닌 것 같아요.

매일 세상이 만들어 준 변비약이 없으면,
그나마 그 고약한 똥마저
제대로 싸지 못하니까요.
******************************************

여기에서 시의 초반부와 후반부를 매개하는 중반부는 한탄과 자조의 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탄과 자조를 제 삶의 현실성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독자인 바로 저입니다. 이것을 수용미학의 관점이니 어쩌고 저쩌고를 떠나 저의 지평에서는 이 시를 이렇게 읽고 이렇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4. 시는 시고 똥은 똥이다
시는 똥이다?
아뇨?
시는 시고 똥은 똥이지요.
왜 이렇게 말이 많나?
시는 시고 똥은 똥이고
시는 똥이다.


• 저의 어설픈 글이 안시인 님의 귀한 시에 누가 되었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시는 똥이다
-안희선

시, 아름답지요.
아니, 시는 정작 그 자신 별로 관심도 없는데
흔히 사람들이 말하길 시가 그렇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꼭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지요.
적어도 이 세상의 가식적인
기준을 떠나 바라 보자면,

똥은 누구나 더럽다고 여기잖아요.
심지어, 자신의 똥까지도.

배변의 쾌감이란 것이 있지요.
때론, 오르가즘보다 더 황홀한 것.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보지요.
변비에 걸린 사람은
좋은 시는 못 쓸 것이라고.

가슴 깊이 응어리 진 것,
속 시원히 쏟아낼 때
쾌감을 느끼지요.

아니라고 하는 시인있으면,
손 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군요.


똥도 잘 싸야겠지요.
황금빛으로,

그런데, 나는 오늘도
냄새 고약한 질 나쁜 똥만 싸네요.

한때는, 내 똥 냄새도
제법 구수하다고 느낀 적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좋은 시인은 아닌 것 같아요.

매일 세상이 만들어 준 변비약이 없으면,
그나마 그 고약한 똥마저
제대로 싸지 못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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