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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노숙자의 어머니 마리아
작성자 CHRIS     게시물번호 -2278 작성일 2005-12-25 21:12 조회수 977

해마다 이때면 거짓이 판을 치게됨을 봅니다.

모두가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통해

이땅의 비천하고 멸시받고 억압받으며 고통받는 사람들이

높여지고 인간다움을 회복하게 되었노라 노래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움인 것을 찬송한다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천하고 낮은 자들이 결코 되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단지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 우쭐해하기 조차 하며 더럽고 비천한 것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복에 겨워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누우셨던 더러운 말구유를 황금빛도 찬란한

말끔한 장소로 변모시켜 놓기조차 합니다. 더러운 것은 사실 싫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더러운 곳에서의 출생과 비천한 마을에서의 유년기, 보잘 것 없는 가정에서의 성장은 단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었으며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접하는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다분히 수사적일 뿐 아니라  의례적으로 내뱉는 무의식적 파토스에 불과해 보입니다.

단적으로, 교회가 속한 지역 컴뮤니티를 멸시하고 경멸하며 우리가 그곳에 살지 않음을 당연시 하며 그들과 섞일 수 없는 구별된 사람들인양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창기와 어울리고 세리와 한 상에서 식사하며 문둥병자, 정신병자, 그리고 당시 사람 축에도 들지 않던 여자들과 아이들까지등  외모와 사회적 지위로 보면 전혀 어울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하셨던 예수님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가히 혁명적이며 기인의 행동입니다.

우리는 지금 편하게 예수님이 예수님인 줄 알고 믿고 있지만 당시의 시대에서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 천한 자로, 위험한 인물로 보지 않고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니 대부분의 당시 중산층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돌을 던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베드로가 세번 부인할만치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하였으니까요.

그분을 흠모하고 그분을 따랐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보면 우리가 속해있고 싶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예수의 오신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본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와 그 분의 세계에 대한 믿음을 진정한 의미에서 체득하고 있는지 검증해본다면 아마도 오늘 자칭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은 예수를 부인하는 그룹 쪽에 속해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권세있는 자를 내치시고 버림 받은자의 친구가 되시는 예수님을 찬양하며 우리도 주님이 가신 길을 걸어갑시다."

이 말은 우리에게 매우 어려운 판단과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자칭 그리스도인의 극소수에게만 해당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권세있는 자를 내치고 버림받은자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혁명입니다. 권세 있는자는 모두 내쳐야할 악인입니까. 버림받은 자들은 모두 보호 받아야할 의인입니까? 도대체 버림받은 자의 친구가 되는 것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된다는 말인가요.

 

 그런 의미에서 김창한 님의 다음과 같은 부연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면서 어딘지 모호합니다. 실제 주님이 행하시고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에 미흡한 말같아서요.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부연하신 김창한님의 해석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해석이 모호호하다는 편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제게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바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관계의 회복, 즉 구원 (salvation)의 완성은 후반부에 나타난 것처럼 만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 (justice)의 실현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약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이 노래. 이것은 버림받은 자들 (outcasts)의 노래며, 노숙자들 (homeless people)의 노래며, 사회적으로 정죄받은 사람들 (deviated people)의 노래입니다. 기득권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폭력으로, 즉 권력으로, 재력으로 약자들을 정죄하는 사람들이 들으라는 노래입니다

 

다만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 때가 되면 홀수처럼 쏟아지는 사람들의 말잔치와 습관적으로 내뱉는 종교적 수사에 경종을 울려 자신의 진정한 실체와 기독교적 이상의 간격을 좁혀가는데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여야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나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신 주님을 눈물로 찬송하면서 손으로는 주님 손에 못을 박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들의 이중성에 대한 경종 말입니다.


☞ 김창한 님께서 남기신 글


마리아의 노래 (Mary's Song; 눅 1:46-55; 공동번역)
46.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47.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48.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50.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51.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53.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54.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55.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마리아의 송가 (Mary’s Song)는 Magnificat라고 불려지는데, 이것은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 (Vulgate) 판에서 시작되는 말이 Magnificat (glorifies; 영화롭게 하다)이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는 문맥으로 봐선 마리아의 노래가 아니라  엘리사벳 (Elisabeth)의 노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누구의 노래든 간에, 이 노래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한 여인의 희망과 꿈이 고스란히 잘 담겨져 있습니다. 개인적인 소망과 민족적인 소망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한 편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노래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른 여인의 신앙이 진솔하게 드러나는 모범적인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노래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①전반부 (46-49 절)는 마리아가 개인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일인칭 (first person)으로 “내 구주,” “내 영혼,” “나를,” “나에게’라는 말에 주목해 보십시오. 마리아는 하나님이 그녀를 축복하신 일을 기쁨으로 받아 들입니다. 그녀는 비천한 신세지만 만민이 그녀가 복받았다고 칭송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녀를 통하여 만민을 위한 구원을 성취할 것이니까요. 그녀가 예상치 않게 하나님의 선물로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녀는 이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비천한 한 여인 (Miss Nobody)를 통해서 축복하셨듯이, 우리들 각자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모든 버림받은 사람들  (outcasts)을 하나님께서 일일이 다 알아 보신다는 믿음, 즉 약한자의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를 기회조차 박탈당한 사람들의 희망의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② 이 후반부 (50-55)는 앞부분과 달리 삼인칭 (third person)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나”로 표현한 것은 이제, 그녀 자신을 넘어 하나님이 백성에게 내린 축복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멸망시키고,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부자들을 몰락시키는 권세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이시고, 이스라엘을 향한 약속을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심은 새로운 변화를 가져 옵니다. 삶의 모든 곳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배고픈 자에게 새로운 희망이기도 합니다. 54절에서 자비를 기억하신다는 말씀.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거짓이 아니고 진실하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희망은 마지막 55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바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관계의 회복, 즉 구원 (salvation)의 완성은 후반부에 나타난 것처럼 만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 (justice)의 실현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약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이 노래. 이것은 버림받은 자들 (outcasts)의 노래며, 노숙자들 (homeless people)의 노래며, 사회적으로 정죄받은 사람들 (deviated people)의 노래입니다. 기득권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폭력으로, 즉 권력으로, 재력으로 약자들을 정죄하는 사람들이 들으라는 노래입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나와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종교가 달라도, 정치적 이념이 달라도, 삶의 방식이 달라도, 다 노숙자 아기 예수에게는 같은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노숙자 예수님이 오신 날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날입니다.


* 성탄절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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