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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동창회 36] 인간은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없다!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12304 작성일 2019-09-14 05:43 조회수 1507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부족시대에 종교가 처음으로 등장할 때, 고대인들은 우주세계를 삼층 세계관적으로 상상했다. 즉 인간은 중간층에 살고, 상층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신의 섭리에 따라 생존할 수 있다는 유신론적 신관을 창작했다. 인간은 자의식적으로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안전장치로 전지전능한 하느님을 자신의 수호신으로 만들었다. 이 신은 전쟁에 나가 부족을 대신해서 싸우는 남성 전투사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고대 부족들과 민족들의 싸움은 신의 전쟁이었다. 또한 고대인들은 하늘 저 밖에 있는 인격적인 신이 자신의 부족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때때로 땅으로 내려와 인간의 문제들에 간섭하고 조정하고 심판한다는 가설을 설정했다. 인간은 신의 징벌과 심판을 모면하고, 보호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충성으로 에 대한 회개 용서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우주진화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기적은 일어난적이 없었으며, 그런 하느님은 현대인들의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신뢰를 잃고,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무용지물이 되어 죽었다. 아직도 그런 하느님에 메어달려 스스로 노예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항상 불안과 초조와 이기심과 사심 속에서 참된 행복과 자유와 의미를 누리지 못하고 산다.

 

인습적인 기독교인들에서 구원받는다는 말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들에게 구원받는 것은 하느님의 징벌 심판을 모면하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에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138억 년의 우주진화 역사에서 이 광대한 우주세계는 우연히 자연적으로 출현했으며, 실제로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는 한 몸이고, 어디가 천국이고 어디가 지옥인지 즉 상중하 층이 없다. 따라서 이 세계 이외에 다른 세계는 없다. 다시 말해 삼층 세계관에서 만들어진 상층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이란 한갖 신화적인 세계의 망상일뿐이다. 오늘날 과학시대의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인간의 구원은 내세적인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삶의 구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구원하느님의 용서가 필요없다. 왜냐하면, 외부적인 하느님, 심판자 하느님, 초자연적인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죽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말하는 인간의 사죄와 하느님의 구원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통제하기 위한 상업적인 속임수에 불과하다. 어떤 모양의 필수조건들을 전제로하는 하느님의 구원은 얄팍한 술책에 불과하다. 인간은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없다. 인간을 용서하고, 심판하고, 징벌하는 그런 부족적이고 옹졸한 하느님은 설득력과 효력이 없으며, 이미 죽었다. 21세기에 하느님이란 말을 사용하기 원한다면 그 의미는 인간의 존엄성을 폄하하면서 인간을 통제하고, 멋대로 조정하고, 이분법적으로 징벌하고 심판하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우주적이고 통합적이고 궁극적인 인간의 현실이다. 하느님은 믿어야하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고 표현이다. 하느님이란 말은 은유(metaphor)이다.

 

회개구원공식은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익숙한 말이며, 생각과 예배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모든 기독교 예배에는 죄의 고백(회개)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 말들의 의미를 표층적으로 또한 모호하게 만들었으며, 교인들은 무지함과 혼돈 속에서 심하게 세뇌되었다. 믿음체계의  죄의 중심성은 교인들의 개인적인 삶은 물론 사회적인 공동체적 삶에 밝은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두려움과 혼돈에 빠트리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우주진화 세계관을 살아내는 현대인에게(sin)라는 말은 인간의 실수와 실패에 대한 문제를 가리키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없다. 인간의 현실적인 삶의 의미와 여정을 서사시적으로 기록한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교회기독교는 창세기의 에덴동산 이야기를 온 인류에게 적용하는 원죄론으로 변질시켰다. 즉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며,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죄가 많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하면 죽어서 천국에 올라가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용서의 필수조건은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고, 교회에 다녀야 한다. 그러나 창세기는 온 인류가 문자적으로 믿어야하는 죄와 용서에 대한 교리책이 아니다. 138억 년의 우주진화 역사와 생명과 인간 생물종의 출현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과 다양하고 풍부한 삶의 경험을 쌓은 현대인들은 고대의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인 원죄론을 이해하지 못할뿐만 아니라, 이것은 비상식적이며 크게 잘못된 논리로써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대단히 위험하다고 인식한다. 교회가 주장하는 죄와 용서에 대한 원죄론은 괴상한 가설일뿐이다.

 

오랜 세월 동안 삼층 세계관적 믿음체계에 의해 심하게 세뇌된 기독교인들은 에 대해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사람들에게 잘못된 것들을 무작정 로 규정하는 것은 성서근본주의적 믿음체계가 원죄론을 합리화시키고,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상업적인 억지수단이다. 성서는 인간의 문제를 나타낼때 다양한 이미지들을 사용했는데, 라는 말은 단지 그것들 중에 하나이다. 성서에서 일반적으로 죄의 의미표적을 빗나가다라는 뜻이다. 교회에서는 표적이 인간의 완전함인 것으로 가르친다. 사람들 가운데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소위 불완전한 사람을 죄인이라고 한다. 예를 들자면, 질병에 걸리거나, 가난하거나, 배우지 못하거나, 육체적으로 부자유한 것 등의 불완전함에 해당된다. 그러나 138억 년 우주진화 과정에서 원초적으로 인간은 완전한 완성품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원초적으로 파충류에서 포유동물로 진화된 인간 생물종은 지난 260만 년 동안 변화해 왔으며, 앞으로도 끝이 없이 진화할 것이다. 인간의 최종 목표는 완전함이 아니라 온전함(wholeness)이다. 사람들은 완전하지 못하거나 온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끊임없이 하느님에게 사죄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무엇인가(what)? [하느님은 누구인가(who)?라는 질문은 잘못된 말이다.] 조건없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눈을 뜨지 못한체 멀고, 마음이 굳게 닫혀 있을 때, 보고 듣게 되는 깨달음인식하느님의 의미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배당하고, 속박당하고, 탄압받고 착취당할 때, 용기희망자유 해방하느님 경험이다. 오늘처럼 극심한 빈부차이의 상황에서 공정한 분배의 정의하느님의 현실(실제)이다. 또한 남성들에게 억눌려 성폭행으로 절망 속에 있는 여성들과 성서적 전통 때문에 자신의 살아갈 권리(낙태)를 박탈당한 여성들에게 남녀평등하느님의 길이다.

 

성서에 인간의 문제들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들을 묘사하는데에 중요한 목적이 있다. 그 이미지들은, 우리의 눈이 멀었으며, 유배상태에 있으며, 묶여 있으며, 닫혀진 마음을 갖고 있으며, 굶주리고 목마르며, 길을 잃고 방황한다. 또한 이러한 인간의 문제들에 대해 상응하는 이미지들도 있다. 그 각각은 치유 해결책새로운 길에 대한 것들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눈이 멀었다면 사죄가 아니라 눈을 뜨고 볼 필요가 있으며, 우리가 유배상태에 있다면 사죄가 아니라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으며, 우리가 묶여 있다면 사죄가 아니라 해방이 필요하며, 우리가 닫힌 마음을 갖고 있다면 사죄가 아니라 마음을 열 필요가 있으며, 우리가 굶주리고 목마르면 사죄가 아니라 음식과 마실 것이 필요하며, 우리가 길을 잃고 방황하면 사죄가 아니라 제 자리를 찾을 필요가 있다. 우리의 문제 즉 소위 에 상응하는 것은 사죄하느님의 용서가 아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인간의 사죄로 하늘 저 밖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은 타자로서의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살아내야 하는 일에 대한 은유이다. 따라서 종교는 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하느님의 용서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 즉 자율성과 창조성과 잠재력과 가능성을 인식하고 온전한 삶을 이루어내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죄를 강요하고, 우리를 용서하는 하느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용서를 팔아먹는 종교의 믿음체계는 거짓과 은폐의 회칠한 무덤과 같다. 그래서 설득력과 효력을 잃고 시들시들 죽었다.

인간의 눈이 멀고, 마음이 닫히고, 소외되고, 묶여 있는 원인은 자의반 타의반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소외된 것은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이기도 하고, 주변 환경이 그렇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의 눈이 멀고, 마음이 굳게 닫힌 원인도 우리 자신의 행위의 결과이기도 하고, 우리의 문화가 우리의 심리와 이해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히브리인들이 노예가 된 것은 그들의 잘못 때문만이 아니었다. 물론 하느님의 징벌도 아니었다. 다시 말해 성서의 핵심은 용서가 아니라 해방과 자유였다. 기독교인들은 눈 먼 것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무지함과 보기를 거절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볼 수 있는 인식과 용기가 필요하다.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존의 중심적인 문제가 아니다. 현대인들에게 라는 말은 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대신 눈이 멀었고, 유배상태에 있고, 소외되었고, 마음이 닫혔고, 문화적 유행에 포로가 되었고, 탄압과 착취에 묶여 있다는 말이 훨씬 강하게 가슴과 머리에 와닿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실존의 문제가 그들 자신의 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 피해자가 된 현실이다. 예를 들자면, 가정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죄와 용서의 메시지가 무슨 의미를 갖는가? 그 피해자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는 죄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그들이 폭력적이며 탄압적인 권력 밑에서 굴종적으로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메시지다. 인간의 고통과 비극의 원초적인 원인은 개인적인 죄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죄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인간의 죄를 위해 죽었다고 믿지만, 예수는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 예수는 공정한 분배의 정의에 따른 만인평등을 외치다 당시의 지배체제인 성전종교와 로마제국의 집단적인 죄에 의해 살해되었다. 기독교인들이 죄에 대해 개인주의적인 관점에 고착하는 믿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조건에 대한 이해를 허약하게 만든다. 따라서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체 하늘 위에 하느님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비굴하고 수동적인 일에만 몰두했다. 결과적으로 가정과 사회와 세계는 분단과 혼돈에 빠졌으며, 끊임없는 전쟁과 테러와 빈곤과 질병과 생태계 파괴를 초래했다.   

 

결론적으로, 라는 말이 인간의 조건을 가리키는 만능 지시어가 될 때, 용서는 만능 해결책이 된다. 이것이 오늘 교회기독교가 죽어가고, 기독교인들이 무지함과 거짓과 은폐의 늪에 빠져있는 가장 큰 원인이다. 만일 눈이 먼 상태가 문제()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죄 용서가 아니라 시력이다. 만일 마음이 닫힌 상태가 문제()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죄와 용서가 아니라 열린 마음이다.  만일 묶여 있는 것이 문제()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죄와 용서가 아니라 해방이다.

 

오늘 하느님의 용서인간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용서보다 새로운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 필요하다. 기독교인의 삶은 용서를 찾는 이 아니라, 유배상태로부터 돌아가는 이며, 끊어졌던 관계들이 다시 연결되는 이며, 속박과 탄압과 착취에서 해방되는 이며, 시력과 청각이 회복되는 이며, 닫혔던 마음이 활짝 열리는 이며, 방향을 잃었던 상태로부터 길을 찾고 제 자리를 깨닫고 인식하는 이며, 인종과 종교 사이에 세운 경계를 넘어서는 이다. 이러한 인식이 인류사회의 밝은 미래를 위해 절실히 필요하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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