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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동창회 46] 교회는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고,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12627 작성일 2019-12-21 06:25 조회수 1907

예수는 과거의 믿음과 전통을 신봉하는 노예생활의 상징인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경고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의 믿음과 가치관은 십자가에서 죽었고, 이제 과거의 자신을 넘어서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돌판에 새긴 문자적인 십계명으로 믿었던 과거의 신앙을 넘어서서, 이제 하느님은 가슴 속에서 생동하는 생기와 같다고 선언했다.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거부한 부족적 교회의 시대는 끝났다. 교회 기독교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예수가 죽은 후 지금까지 역사의 대부분 동안 예수의 교회는 없었으며, 참된 기독교인은 대단히 희귀했다. 예수는 교리와 제도와 권위와 전통에 대한 믿음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만들어진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 교회 기독교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조정하기 위해 배타적이고 탄압적이고 상업적인 믿음체계를 만들었다. 예수는 현세적인 삶내세적인 믿음 보다 더 소중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정직하지 못한 교회예수의 정신을 거부했다. 생존의 두려움과 사심에 빠진 교회는 모든 사람은 남녀노소와 빈부와 계급의 차별을 넘어서서 평등하고 자유하다는 예수의 우주적인 가르침과 그의 삶을 배반하고, 삼층 세계관에 기초한 삼위 일체와 구원론과 창조론을 만들어 사람들을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키고, 수동적인 꼭두각시로 만들어 강압적으로 통제하고 착취했다.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인 야욕으로 니케아 신조(325)가 만들어진 이래 지난 1700 년 동안 교회와 신자들은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고,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설득력과 신뢰를 잃고 쓸모없는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여전히 교회 간판과 십자가를 내걸고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혼돈을 심어주며, 값싼 구원을 팔아먹는 교회는 예수의 교회가 아니다.

 

필자의 칼럼이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교회를 위한 기독교 개혁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마치 기독교 폐지를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상 예수가 죽은 후 예수의 정신은 사라지고, 만들어진 예수를 맹신하는 교회가 등장했다. 이 교회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우롱했다. 단적으로 말해서 역사 속에서 예수의 교회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주류 사회를 통제했던 교회 기독교는 자기 중심적이고 역사의 흐름을 역행했기 때문에 급격한 쇠퇴기를 맞이하고 유약한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교회 기독교는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거짓과 은폐를 뻔뻔스럽게 드러냈다. 더욱 불행하게도 교회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결코 솔직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과 과학의 발전을 옳바르게 인식한 사람들이 역사적 예수를 회복하려는 예수 살아내기 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미국의 예수 세미나 학회가 잃어버린 참 사람 예수를 되찾는 탐구를 계속하고 있으며 역사적 예수의 교회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 기독교가 급속도로 죽어가는 가장 큰 원인은 옛 것을 떠나 보내고 새 것이 되는 자신의 자율적인 변화라는 자기초월을 포기하고 여전히 고대의 내세적인 신조의 믿음에 목을 메어달고, 비참한 노예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리적인 신조의 믿음이란 단지 불완전하고 한시적인 생각의 유형일 뿐인데 신자들은 이것을 하느님이 내려준 완전하고 영원한 율법으로 착각하고 있다. 교회 내부에서 맹신하는 신조의 믿음은 우리가 죽은 후에, 그리고 아마도 이 세상에서조차도 그 자체를 초월하는 것을 약속한다고 스스로 속이고 있다. 신조의 믿음으로는 자율적이고 심층적인 깨달음의  종교가 불가능할뿐만 아니라, 은 더욱 수동적이고 부자유하고 불만족스럽고, 항상 불안과 이기심만 가증할 뿐이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맹신하는 신조의 믿음으로는 교회가 그 자체를 넘어서서 저 멀리에 있는 더 큰 빛에까지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다.

 

종교적인 신앙 생활이란 자신이 쌓아 놓은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자신의 삶을 자기 것으로 삼는 자율적인 과정이다. 교회와 목회자와 신조와 전통 다시 말해 타자들이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대신해서 살 수 없다. 비단 하느님이라도 나를 위해서, 나를 대신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 유신론적 하느님은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 죽었다. 기도는 초자연적인 하느님 즉 타자에게 나를 위해서, 나를 대신해서 무엇인가를 대행해 주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진리는 열정적으로 내면화의 자기화 과정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진리는 생활과 실천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야 한다. 믿는다(believing)는 말의 어원이 사랑한다(be-loving)는 의미이듯이, 믿음이란 관념적인 말장난이 아니라 살아내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따라서 믿음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은 귀로 듣기만 하고, 장황한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위선을 이제 중단해야 한다. 성서의 메시지는 생활과 실천 속에 완전히 베어들어야 한다. 입술과 머리에 머물러 있는 믿음은 손과 발과 가슴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결국 믿음을 넘어서지 못하는 신앙 생활이란 예수의 말대로 회칠한 무덤과 같다.

 

1840년대에 서구사회에서 대표적으로 스트라우스, 포이에르바하, 칼 막스의 사상 속에서 급진적인 인도주의(humanism)가 발전했다. 그때 이후로 서구 문화의 주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인권, 인도주의적 윤리, 복지국가, 환경운동, 예술 분야에서의 모더니즘이 점진적으로 확립되었다. 더불어 비단 변화의 속도는 느리지만 교회 안밖으로 내세적 교회로부터 현세적 하느님 나라에로의 운동이 계속되어 왔다. 그 현상 중에 하나로 교회 건물은 종교적 의식의 장소가 아니라 단지 여행자들의 관광코스가 되었고, 교회 안에서 믿음을 초월한 사람들은 교회 밖 세속적인 세상 속으로 빠져 나갔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중보적 교회 기독교는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아 그 자체가 빠져 나올 수 없게 되었다. 교회는 그 자체를 절대화해 왔기 때문에, 이제 스스로를 초월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따라서 종교로서 적절히 기능을 발휘할 수도 없게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교회는 성서문자적으로 절대화하기 때문에 역사의 흐름과학의 발전인간성의 새로운 인식에 대해 무지함과 무식함 속에 빠져 자기초월을 스스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즉 교회의 성서직역주의와 이에 따른 실재론적, 삼층 세계관적 우주론내세적, 형이상학적인 신학이분법적 교리와 전통은 그 자체가 관념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교회는 여전히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거부하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 종교로 초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삼층천의 우주론에 근거해서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는 부족적인 우주론 없이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삼층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체 그 우주론에 갇혀있다. 오늘 교회 기독교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대 우주론에 철저하게 세뇌되었으며, 이미 만들어진 성스런 우주가 있으며 저 밖에는 객관적으로 실재하며 이해가능한 사물의 질서가 있고 그 질서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질서에 맞추어 살도록 미리 설계되어 있다고 너무나 확신하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반실재론적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 정말로 어렵다.

 

오늘의 종교 개혁삼층 세계관적 우주론과의 정서적 내지는 정치적 연결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다.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 나라 종교탈우주론적이다. 이것은 죽음을 매우 가깝게 경험하고, 죽음은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 영원함을 경험함으로써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 만물은 사라지는 것이고 흘러 가는 것이다. 예수와 부처가 가르친 보편적 무상함의 사상을 삶 속에서 살아내야 한다. 다시 말해, 종교적 및 철학적 개념들을 삼층 세계관적 우주 개념에 짜맟추어서는 안된다. 우주 세계질서는 인간의 언어가 만들어낸 그림이다. 물리학은 우주라는 전체적 개념을 유용하게 사용하지만, 종교는 우주 개념을 초월해야 한다.

 

인간은 사고함으로써 존재한다고 천명한 르네 데카르트는 사람들에게 보편적 의심의 순간을 통과하도록 요청함으로써 근대 비판적 사고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이것을 끝까지 철저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근대에 비판적으로 검증된 경험적 지식의 길을 열었다. 또한 데카르트의 사상을 밀고 나간, 대표적 근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철학, 윤리학, 종교 문제에 대해 사람들에게 허무주의를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도전했다. 즉 우리의 두뇌에서 본질 개념을 씻어내며, 또한 저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 우리를 위해 우리의 가치들을 결정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는 생각을 깨끗히 씻어내도록 도전했다. 니체는 우리로 하여금 맨 처음으로 돌아가도록 강력하게 요청하며, 나아가 예수급진주의를 다시 한 번 심층적으로 사고하도록 도와준다.

 

1700년된 늙은 교회 기독교는 자기초월이라는 종교 개혁을 통해서, 삼층 세계관적 신학과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인 교리들을 포기하면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역사적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의 성만찬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예수가 집행한 최초의 성만찬의 심층적인 의미는 제자들이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자신들의 옛 모습을 버리고 새롭게 예수가 되어, 예수가 산 것처럼 산다는 자기초월의 의식이다. 또한 예수가 죽은 후의 오순절 사건은 하느님이 인간과 분리된 타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 내면화되어 인간에게 희망과 용기와 기쁨이 된다는 의미였다. 다시 말해, 외부에 타자로 믿었던 하느님을 떠나 보내고, 이제 하느님의 의미가 내면에서 삶의 용기와 희망이 되어 외부로 표출되는 새로운 삶을 살아내는 자기초월의 순간이 오순절이다. 오늘 교회가 예배에서 집행하고 있는 성만찬과 오순절의 의식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는 자기초월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고, 세상에서 역사적 예수의 하느님 나라 종교의 도래를 선언하는 것이다. 교회와 신자들은 자신을 넘어서야 참된 인간이 될 수 있고, 그것이 구원의 길이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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