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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파와 헬라파의 패싸움 잔혹사 |
작성자 강현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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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1289 |
작성일 2009-04-04 10:09 |
조회수 1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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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lus 님. 안녕하세요.
저는 제가 느끼고 판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성서구절을 인용하는 것도 좋지만 그 내용에 대한 님의 의견을 말씀하셨더라면 좀 더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고린도 전서를 인용하셨으니 바울 이야기를 좀 해야겠군요. 여기는 교회 홈피가 아니므로 밑도 끝도 없이 고린도 전서의 글귀만을 가져다 놓으면 읽는 분들이 불편해 할 수 가 있습니다. 공동번역이 아닌 개역성경은 저 같이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된 사람들은 무슨 소리를 써 놓은 것인지 알아먹기도 어렵구요.
저는 개인적으로 사도바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주류 신학자들도 이 사람이 예수의 기본정신을 크게 훼손했다는 해석과 주장을 하지요. 그러나 기독교의 세계종교화를 가능하게 한 장본인이라는 점에서는 그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바울이 아니었으면 기독교라는 종교는 아마 팔레스타인 지방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군소 종교로 전전하다 몰락해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당시 교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양대 축 이었던 히브리 파와 헬라 파의 표면적인 쟁점 중의 하나가 이방인들의 할례 문제였는데 아마 당시 이 할례 문제는 오늘의 종교다원주의 문제만큼이나 심각한 교리적 쟁점이었을 것 입니다. 결국 이 논쟁에서 비 히브리적인 ‘이단 사설’을 늘어놓았던 헬라 파의 보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토착 히브리 파를 이끌고 있었던 베드로를 이론적으로 제압하고 결과적으로 교권투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헬라 파의 승리는 기독교로 하여금 지정학적 한계를 못 벗어난 토착종교로 연명하다가 사멸할 운명에서 벗어나 세계종교로 거듭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지요.
예수를 3 년 동안이나 졸졸 따라다녔던 국내파들이 예수를 단 한 차례도 본 적이 없는 (이 문제로 텃세와 구박이 심하자 꿈에서 한 번 봤다는 소리를 하기는 했습니다) 바울이 이끄는 굴러들어 온 돌들’에게 패배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 권력투쟁에서 베드로에 비해 가방끈이 다소 길었던 바울의 주 무기는 줄기찬 편지질이었는데 히브리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된 이 편지들 중 하나가 바로 님이 인용하신 고린도전서입니다. 어쨌든 그의 편지들이 신약의 4 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헬라 파의 승리가 얼마나 압도적이었는가를 잘 알 수가 있지요.
다만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당시 사도바울의 편지들의 대부분은 히브리파와의 교권투쟁의 고비마다 그가 사도권 박탈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부랴부랴 써 갈겨댄 편지라는 겁니다. 잘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격한 감정이 그의 글 곳곳에 배어 있지요? 아마 그래서 그런 걸 겁니다.
어떤 학자는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가리켜 당시 유대인 인구 분포상 팔레스타인에 거주했던 토착 유대인 숫자(약 1-200 만) 보다 이른바 디아스포라 (해외교포) 숫자 (5-600 만)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 이유였지 않나 추측하기도 합니다. 단순한 쪽수의 문제 뿐 아니라 이미 해외에서 오래 살아 유대전통과 율법에서 많이 자유로워진 이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와 이방인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예수상이 필요했는데 이 좀 더 자유롭고 다원주의적인 예수상을 바울이 적절하게 수용해서 다시 세워주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기왕 들어왔으니 제가 ‘평신도 반론권’에 대한 글을 올린 배경을 좀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시간이 없어 따로 쓸 수는 없고 어젯밤 어느 분에게 드렸던 제 글에 대한 배경설명이 있는데 이것을 그냥 복사해서 올리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000 님, 안녕하세요. 답글 감사합니다.
저는 교회예배의 본질과 교회공동체가 가지는 특수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대 예배에서 설교내용을 주제로 토론을 벌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색한 일이지요. 많은 교회들이 시간편의상의 문제로 예배 직후에 공동의회 같은 것을 개최하다 싸움박질을 벌이는 꼴도 많이 봤는데 아무래도 예배 자체는 일단 성례로 남겨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 제 생각이기도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다른 시간을 정해 성서적인 쟁점과 논제들을 가지고 토론이나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신앙고민의 내용과 단계가 제 각각인 교인들이 어떻게 최대공약수를 찾아 토론을 벌일 수 있는가는 일단 제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접겠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홍수이야기를 시작으로)는 좀 다른데 있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한인 식품점 등에서 에드먼턴 한인교회들이 배포한 설교cd 들을 집어와 차 안에서 들어 왔습니다. 모니터링을 하려고 그런 것은 아닌데 그런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 중 딱 한 분의 설교가 대체로 보수적이면서도 합리적인 기조를 이어갔었는데 2 년 전 아프칸 사태가 터진 뒤 하루아침에 바뀐 것을 알 수 있었지요. 2007 년 8 월에 한 그 설교를 어쩌다 지난 달에 듣게 됐습니다. 본 글에서 제가 늘어놓은 무저갱 지옥…… 같은 이야기들은 제가 그냥 한 말들이 아니고 그 분이 한 말 그대로 입니다. 인질비난 여론을 두고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하며 저주를 퍼부은 대상에는 아마 저도 포함돼 있을 것 입니다.
저는 그 설교를 들으면서 일종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나를 두고 한 말이 아닌데도 테러를 당한 기분이었지요. 제 어린 시절 교회배경은 기장이나 연합교회 같은 곳이 아니라 지극히 보수적이고 율법적인 교단이었습니다. 지금은 기억의 편린에서 거의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 ‘공포’가 어떤 식으로 부당하게 영향을 미치는 가는 아직 앙금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공포심을 일깨운 그 ‘설교’에 대한 戰意 같은 것이 되 살아난 모양입니다. 이런 종류의 설교가(오히려 더 심각한) 이민교회에서 횡행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 역시 알면서도 무심코 지나쳤던 문제를 그 ‘설교’가 일깨워 준 셈이지요.
사실 이민교회는 본국의 일반교회와는 그 성격이 많이 다를 것 입니다. 신자 공동체라기 보다는 이민사회에서 문화동질성을 찾아가는 일종의 social gathering place로서의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민사회란 종교에 관계없이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공간이지요. 알버타 주 같이 diversity 의 농도가 떨어지는 곳에서는 더 말 할 나위가 없구요.. 말씀하신 대로 교회가 토론공동체는 아니지만 이민교회가 순전한 신앙공동체만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민사회 전체에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생각해 봐도 그렇구요. 이런 저런 상황을 보면 교회 교역자 또는 지도부의 발언이나 이념-사상적 영향력 등은 반드시 이민사회의 견제와 감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견제와 감시의 몇 가지 형태로서 온라인에서의 문제제기 등을 제기햇던 것 이지요.
캘거리-에드먼턴에 있는 대형교회(?) 교역자들은 결코 제 문제제기 같은 것에 반응하지 않을 것 입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하는 말을 누가 대신 해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유는 그게 아니지요. 잘 아시겠지만 전문가(그들이 진정한 전문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마추어와 자기의 전문분야 주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 입니다. 압도적으로 승리해야 본전이요 지거나 비기기라도 하면 개망신뿐인 그 위험한 싸움에 누가 자기 이름을 걸겠습니까? (표현이 유치하고 교만해서 죄송한 데 다른 표현이 지금 잘 떠 오르지 않아서 그러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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