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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한국 진보 기독교의 문제 |
작성자 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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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8440 |
작성일 2015-10-09 12:01 |
조회수 22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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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님의 글에 댓글로 써야 했는데 너무 길어서 따로 올렸습니다. 누가 진보이고, 누가 보수인지에 대한 판단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진보인듯한 발언을 하지만 속은 보수인 것을 숨기거나 자신도 모르고 있는 사례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자칭 자신들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진보가 아닙니다. 진보와 보수의 분별기준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기는 하지만, "몸학 기독교 연구소" (www.freeview.org)를 운영하는 정강길 님이 진보와 보수에 대해 상세하게 밝혔습니다. 특히 한국 진보 기독교의 모순을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그 분의 글을 부분적으로 발췌해서 소개합니다. 정강길 님은 한신 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기존 진보 기독교의 문제*
흔히 잘 알려져 있듯이 지금까지의 보수와 진보라는 표현이 지시하는 현상들을 볼 때, 대체로 보수(保守, conservativeness)는 지켜야 한다는 자세이고, 진보(進步, progress)는 기존의 것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자세를 지배적으로 견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보수는 사회적으로
우파에 많이 가깝고 진보는 좌파에 많이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나의 동일한 사건을 두고도 저마다
달리 해석하는데, 결국은 보수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진보는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지켜야 하는 것이며, 무엇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일까? . . . . . 현실적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도대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지킴>에서 <바꿈>으로 나갈 수 있게끔 하는가에 대한 바로 그 지점을 찾는 것이 작금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고 본다.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가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지켜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가치라면 당연히 바뀌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어떤 지점이 우리로 하여금 지킴에서
바꿈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하는가?. . . . .
오류와 비극을 통해보는 기독교 역사: . . . 이천 년 전의 예수사건 자체가 그때까지의 유대교 사회의 오류와 비극에 대한 성찰로서 마련된 일종의 새로운 대안 유대교 형성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이것이 결국은 후대에 기독교로 이어진 것인데 그러한 전승 과정에서는 또한 아무 문제가 없이 전달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매우 꼼꼼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다. . . . . 신학은 언제든지 <재신학화>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중세 때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가 각각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지고 신학적 작업을 했다면, 오늘날 우리도 좀더 나은 철학적 맥락을 가지고 신학적
구축을 못할 것은 또 뭐겠는가. . . . .
현재의 한국 기독교의 진보 진영은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오늘날 현재의 진보 기독 진영은 주류 보수 기독교의 한계들을 제대로 넘어서고 있기나 한 것인가? 기이하게도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오늘날 진보 기독교인들을 떠올릴 때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물으니까 거의 대부분은 "사회운동을 하는 기독교인"
혹은 "좌파적 입장을 지닌 기독교인"으로 이해하는 답변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시 말해서 "좌파에 가까운 사회적 실천운동을 하는 기독교인"을 진보기독교인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사실상 진보 기독교인들 이미 스스로부터도 그 같은 정체성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매우 강한 걸로 여겨진다.
대체로 진보 기독교인들의 신앙관을 보면 정치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들이 매우 지배적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나 자신이 이를 기이하다고 보는 이유는
적어도 진보 기독교인이라면 1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기에 “기독교 자체의
문제”에 1차적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 그보다는 정치 사회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표방할 때가 많기에 하는 얘기인 것이다. 나는 지금 정치적ㆍ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무관심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리는 1차적으로는 종교의 자리이기에 기독교
자체의 문제에 더 관심해야 함을 말해주고 싶어서다. 적어도 본말이 전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사회운동적 기독교인>이라기보다 <기독교적 사회운동가>가 더 적절할 것이다.
. . . . .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서 보다 시급한 것은 이미 기독교 자체의
문제다. 그게 더욱 1차적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1차적 사업은 기존 기독교가 계속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오류와 비극들에 대해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기독교 다시 수립하기인 것이다. 오늘날의 진정한 진보 기독 운동은
기존 기독교 자체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재수립 운동이다. 즉, 대안 기독교 운동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1차적인 작금의 진보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 . . . 보수 기독교인들의 어줍잖은 대중문화 정죄론과 진화론을 무시하고 창조과학을 퍼트리는 것에 대해 진보 기독교인들은
분명한 분노를 표명할 필요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현장이야말로 사실상 더욱더 위험한 것임에도 그 심각성을 잘 못느끼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 . . 작금의 진보는 기독교인들의 사회운동이 아니라
이제는 기독교 자체를 새롭게 건설하는 과업이야말로 이 시대에 주어진 현재적 진보라고 본다. . . . 진정한 <진보>란 <진짜 보수>를 의미하며,
그것은 적어도 오류와 비극에 대한 성찰로서 지킬 것은 지키고 바꾸어야 할 것은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아는 진영일 게다. 진보에 대한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나 자신은 내가 속한 그리스도교의 자리부터가 새롭고
건강하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보는 것이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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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요. 정강길님의 글 역시 선언만 있지, 분석은 없습니다. 구체적 사회적, 역사적 과정에 대한 성찰없이 신학화해야 한다는 선언은 도대체 뭘 말하는 것인가요?
"그런데 나 자신이 이를 기이하다고 보는 이유는 적어도 진보 기독교인이라면 1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기에 “기독교 자체의 문제”에 1차적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 그보다는 정치 사회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표방할 때가 많기에 하는 얘기인 것이다."
도대체 뭘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이 문제는 1990년대에 민중교회 담론에서 고민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없는데 신학화라...말도 안되죠. 늘봄님께서 교리주의에서 벗어나라고 하지만, 종교의 구성요건으로 교리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죠. 어떻게 교리나 강령없이 조직을 유지하나여? 민중교회 운동할 때, 운동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운동의 기초공동체로서의 교회조직을 멀리했고, 교역자들은 그래도 교회는 필요하다고 강조했었죠.
늘봄님은 다른 아래 댓글에서 " 탄생할 공동체는 종교적인 모임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삶의 공동체입니다. 진보 보수, 우리편 네편을 가리는 정치적인 단체도 아닙니다. 저 뿐만 아니라 모든 동참자들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비전을 내어 놓고 있습니다."라고 상반된 말씀을 하시고요.
정강길님은 그냥 교회운동하자는 겁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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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적 여성주의에 대한 질문 포스트를 올렸는데 거의 동시에 늘봄님께서 글을 올리셔서 일단 사회운동과 관련된 토론이 더 되어야 할 것 같아서 삭제했습니다. 읽으신 분들께 죄송하구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올리겠습니다. 아프리카 올림
* 저는 여기에 기독교 정체성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진보운동이 그냥 사회운동이든, 종교성을 결합한 운동이든 그것은 특정 조직의 문제라서 여기에 논의될 가치가 별로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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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께서 링크 달아 주신 “몸학기독교연구소”에 들어가 봤습니다. 들어가보니 새로운 것도 있고 배울 것도 있을 것같습니다. 민중신학 까는 것도 보니 나쁘진 않다고 보구요. 새로움은 항상 옛것을 까고 나오니까 나쁠 것은 없고 a good addition이라고 봅니다. A good addition이지 이것이 전부라고 보면 안됩니다. 정강길님은 한신대를 나와서 민중신학적 담론에 익숙할 것 같고 그동안의 논의를 잘 알것 같습니다.
로그인 하지 않으면 자료가 차단되어 읽을 수가 없어서 뭘 주장하려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동안 한국적 신학으로 부상한 민중신학이 교회성보다는 사회성에 경도되다보니 본말이 전도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몸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지 모르겠네요. 몸의 문제는 이미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이 깊이 천착하신 것이었죠. 김용옥 선생의 기철학도 그렇죠. 여성사회학자 메리디쓰 맥과이어도 몸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했으며, 아래 소개한 메리 더글라스도 몸의 문제와 사회구조를 연관시켰었습니다.
여전히 저한테 의구심이 생기는 것은 몸학이 과연 사회변화와 개혁으로 나아갈까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신학도 열려 있는 것 같지만, 똑같이 사회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고, 윗분도 마찬가진 것 같아요. 그것은 몸이나 깨달음 말 자체에 바로 사회적 속성이 현저히 떨어진 다는 것입니다. 맥과이어가 몸의 사회성을 강조했지만, 집단으로서의 사회문제까지 나아가는데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타종교와 동성애 등등에 대해서 열려 있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죠.
또 한가지 민중신학과 기독교사회운동가들을 보고 종교성을 잃어버렸다는 주장은 말문이 꽉 막힙니다. 이것은 여전히 신학적 이원론에 빠진 것이죠. 종교학자 니니안 스마트는 종교에는 6가지 차원, 즉 경험적, 신화적, 교리적, 윤리적, 의례적 사회적 차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종교에 따라서 그 강조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교리를 강조한다면, 불교는 깨달음 , 즉 경험을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힌두교는 의례가 강하죠. 민중신학이 독재정권과 항거하면서 민중을 발견해서 종교의 집단성 그리고 종교의 사회성을 발견했다면, 요즘엔 먹고 살만하니 웰빙이니 힐링이니 또는 뉴 에이지적 깨달음의 요구에 부응하면 될 일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한국 기독교의 진보 진영은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라는 한 것은 좀 강하게 말해서 아주 시건방진 말입니다. 진보는 변화와 혁신이 기본 테제인데, 사회적 변화보다는 몸철학이니 깨달음을 이야기 한다고 사회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심리적 위안과 몸의 웰빙에 그칩니다. 통전이니 통섭이니 다 개념적 웅덩이를 맴도는 것이죠. 이것은 진짜 진보성과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이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고투하면서 형성한 종교의 사회성을 이렇게 쉽게 내리 깔아선 안되죠. 캐나다 연합교회의 위대한 전통 가운데 하나는 소수지만, 사회복음주의 사상을 이어 받아 종교의 사회성을 깊이 천착해 들어갔었다는 것입니다. Ben Simillie같은 신학자는 아예 책 전체를 사회를 분석한 것으로 그의 신학 작업을 채우기도 하였습니다.
전에도 지적했지만, 깨달음의 신학은 종교적 경험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해야 하고 몸의 신학(말이 되는지 모르지만) 역시 사회적 몸에 대한 인식으로 끌어 올려야 됩니다. 어느 시대고 유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가 요청하는 에피스테메를 무시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전개하는 것이 모든 것을 통괄한다고 자신하면 건방진 것이죠. 적어도 위분이 민중신학을 비판하려거든 기독교적으로 말해서 "민중의" 교회의 현장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1970-1990년대에 몸을 불사른 민중교회 운동하는 분들의 소리를 들어야 하죠.제가 볼 때, 종교성과 신학적 관념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한 것입니다.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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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 좋은 글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지인들에게 가끔 하는 말이지만, 우리나라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일반적으로 존경받는 캐톨릭 단체가 있습니다. 이들이 존경받는 이유는 멀리는 공화/민정당, 가깝게는 이명박/박근혜에 반대한다는 건데, 저는 이분들이 여성사제문제, 아프리에서 콘돔태우는 무식한 신부들 문제,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부들에 의한 아동강간/성학대 문제, 동성애자 문제, 환경문제등등에 대해서 일관적 문제제기를 했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저는 별로 없습니다.
늘봄님이 들려주신 얘기는 제가 오래전부터 해오던 얘기와 비슷하단 점에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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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사회구제단은 한계는 많죠. 여기서 말하는 신학운동은 개신교사회운동을 말하는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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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종교인이 아니니 신학운동은 모르고, 제 3자의 입장에서 어떤 캐톨릭 단체에 대해 했던 얘기와 비슷한 얘기가 나와서 반가왔습니다. 다른 신학운동보다 향기가 나서 좋습니다. 예컨데 창조과학 똘아짓에 대해 기독교가 분노하자고 얘기하니 최소한의 지성을 갗춘 신학운동인거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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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래요. 제 3장의 입장에서 봐 주시는 것도 의미 있다고 보구요. 다양한 형태의 신학운동은 개신교 전통입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창조과학부터 무신론적 기독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신학적 소개를 가장 빠르게 전달해 주신 분은 민중신학자 서남동 선생입니다. 이미 1960년대에 진화론의 신학, 생태학의 신학을 소개한 분이죠. 1970년대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후 그분은 새로운 신학전기를 맞았고, 과로로 일본에서 쓰러지기 전까지 민중신학을 하신 분이죠. 참 아까운 분입니다.
종교인이 아니라도 지난 번 밴쿠버 심리학자는 종교현상을 잘 이해하더군요. 이 분이 틸리히의 존재의 근거라는 개념을 비판했는데, 저는 수긍하는 편입니다. 제가 틸리히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대중적 수용은 다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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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탈신학화(탈종교화)를 선언한 분이 어째서 이렇게 재신학화 주장 글을 퍼오신는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자연을 신이 없어도 설명가능하다고 하셨듯이, 신학이 없어도 자연을 설명하는 것이 당연히 가능하고, 그런 면에서 신학은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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