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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땅에 뿌리를 내리며 (16번째)
1976년 2월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순진이의 가족들과의 첫 대면에서 배를 쫄쫄 굶은 것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기분나빠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진이의 언니 말인즉
“여자의 집에 처음 왔을 때, 음식을 대접하면 일이 잘 안된대요.”라고 했으니, 결국은 일이 잘 됐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기에 저녁 대접을 안한게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맘에 쏙(?) 들었다는 이야긴데……

순진이의 가족을 만난 후로는 중매를 한 여동생은 정말 손을 묵고 앉아 있었고, 다른 가족들도 여동생이 시끈둥하고 있으니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순진이를 몇번 만나면서 이야기도 해보고 함께 지내보니
‘정말 착한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입도 열지 않던 사람이 이야기도 잘 했고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였다. 나의 마음은 점점 순진이에게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생기기 시작했다. 토론토 근교에 한인 동포들이 3~4천명 정도라고 했으니 동포사회가 뻔했고, 잘 모르는 사람들도 한 다리만 건느면 모두 알만한 사람들이었다. 조금만 수소문을 해 보면 집안 사정을 빤~하게 알수 있었다. 게다가 순진이의 형부는 한인사회에서 잘 나가는 사람중의 한 사람이었으니 부러움의 대상도 되었고 질투의 대상도 되는 사람이었다. 공교롭게도 나의 형과 남동생의 친구들 중에 순진이의 형부 밑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의 말이
“왜 하필이면 그런 사람과 사돈을 맺을려고 해.”
“아랫 사람에게 말을 막 하는 사람.”
“함께 일하기 힘든 사람.”등등 좋은 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백번 이해가 됐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대하던 태도를 보면 충분히 그런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기사 나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인사도 악수도 안하고, 한다는 첫 마디가 “뭐 하슈~”였으니까. 여동생이라도 내 편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중매쟁이까지 “거봐, 내가 뭐랬어!”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나는 사면초가였다.
“계집애 속알머리라고는 밴댕이 속같이……”
“제일 친한 친구라더니 겨우 요거냐?”
“계집애야~, 애초에 시작을 하지 말지!”
나 혼자 아무리 악써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순진이는 참 착한 여잔데……’

순진이의 집에서도 나와 우리집에 대해서 알아본 모양이었다. 순진이의 형부와 우리 교회 목사님과 안면이 있는 사이여서 나에 데해서 알아보니 고맙게도
“토론토에서 찾기 힘든 일등(?) 신랑감!”이라고 극찬을 했단다. 그도 그럴것이 그 당시 나는 유년주일학교를 책임지고 정신없이 뛸 때였으니까, 목사님 눈에 고렇게 참~한 청년이 어디 있었을까! 또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줄을 대어보니, 하나 같이
“아~ 형제 많은 집.”
“형제끼리 우애좋은 집”등등 모두 좋은 이야기만 한 것 같았다.

순진이의 집에서는 뭔가 기대하는 눈치였고, 우리집에서는 이젠 그만 끝냈으면 하는 눈치였다. 나는 순진이를 만나면서도 착찹한 심정이였다. 결혼이라는게 두 사람이 만나서 사는 것이지만 양가의 가족들이 연결되어 있으니……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다.
“어진아, 요즘 어때?”
“그저 그래요.”
“결혼이라는게 나처럼 쉽게도 하지만, 힘든거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의 얼굴을 결혼하시는 날 처음 보셨다고 하셨다.
“내 생각엔 순진이 괜찮은 애 같더라.”
“……”
“제일 중요한 건 네 생각이야. 그리고 순진이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이고……”
“……”
“주위에서 이러구 저러구 이야기를 하지만 그건 중요한게 아니야.”

아버지 말씀은 순진이의 형부가 좀 힘든 사람같긴 하지만, 그것도 사업을 하다 보면 들을 수 있는 이야기고, 사람들은 열번 잘 해주다가도 한 번 잘못 해주면 그 한번 잘못한 것을 이야기하게 마련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사업이라는게 쉽지 않고 더우기 사람을 다루는게 제일 힘드는 일이라고 하셨다. 설사 순진이 형부가 정말 힘든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집에서 4년 이상 같이 살면서 모든 살림살이를 돌보았다면, 순진이의 사람됨을 더 볼 것도 없다고 하셨다.
“어진아, 나라면 순진이와 결혼하겠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잘 해봐!” 아버지께서는 어깨를 툭툭 쳐주셨다.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다음 날 퇴근 후에 순진이를 만나서 공원에 갔다. 토론토에도 한국에서처럼 아늑한 찻집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요즘 아이들 처럼 다아야몬드 반지를 준비해 가지고 멋진 Restaurant에서 무릅을 꿇고 청혼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눈이 쌓인 공원에는 가로등 불빛이 눈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순진이의 손을 잡았다.

순진이의 손은 항상 따뜻했다.
“순진아~” 내 목소리가 예전과 좀 달랐던 모양이었다.
“……” 대답 대신 내 얼굴을 쳐다봤다.
“순진아~…… 순진아~, 우리 결혼하자.”
“……” 뜻밖에 청혼에 순진이는 멍~한 표정이였다.
“나 잘할께. 우리 결혼하자.”
순진이는 계속 말없이 내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순진이의 손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러다가 순진이는 들릴듯 말듯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기도해요……”

우리는 두손을 마주잡고 기도를 했다.
“……… 하나님, 부족한 사람들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려고 합니다. 서로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면서 열심히 살게 해 주십시요. 저희들이 심는 사랑의 나무에 아름다운 사랑의 꽃을 피우게 해 주십시요. 많은 사랑의 열매를 맺게해 주십시요………”
밖에는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차창에 몰아치고 있었지만, 차안에는 우리들의 사랑의 온기로 훈훈했다.

순진이를 꼬~옥 안았다. 순진이의 눈에 맺인 이슬방울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꼬리글: 우리는 아버지의 충고에 힘을 얻어 결혼을 했다. 내가 가끔 “시아버님 덕분에 나같은 남편과 사는줄 알아!” 아내에게 이야기한다. “그럼 알지! 그래서 항상 아버님께 고맙게 생각하잖아요.” 아버지께서는 아내의 음식을 참 좋아하셨다. 아내도 친정 아버지 모시듯 했고……

“여보, 그런데 왜 기도를 하자고 했어? “믿~씁니다”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아내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얘기해봐. 왜 그랬어?”
“당신이 나를 만나면, 망서리면서 뭔가 재는 것 같았어요.”
“내가 그랬나?”
아내는 우리집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만남에 부정적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 꼼짝 못할줄 알았지롱~”
“머리 하난 기막힌 사람이군!”
여자들에게는 남자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번쩍이는 예지(叡知)가 있는 것 같다.

나의 맏동서(한바트면 우리 결혼을 못하게 할뻔한 사람)는 4년 전에 우리들의 곁을 떠났다. 무뚝뚝하고 말은 좀 거칠었지만 참 좋은 분이었다. 가끔 남의 오해를 살때도 있었지만, 마음은 어린 아이와 같은 분이었다. 그 여리고 순진한 마음을 말로 표현할 때, 엉뚱하게 표현되는게 흠이었지만…… 일단 사귀고 나면 ‘아이구~ 큰일날뻔했네! 이런 좋은 사람을……’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분이었다. 맏동서는 20살때, 동생과 둘이서 월남을 했단다. 밑으로 동생들이 다섯이 더 있었다고 했다. 나를 볼때마다, 동생들 생각이 나서 그랬는지 많은 사랑을 내게 주었다. 맏동서가 보고싶다!

기사 등록일: 200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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