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봄님의 참고문헌 도서에도 나온 라일리의 책에서 서술된 예수의 영혼관에 대한 개략입니다. 본인의 사상과 반대되는 것을 인용하는 자유는 자유죠. 하지만 이것도 표절의 일종일 수 있습니다.
** 이 포스트는 지난 번에 제가 올린 “예수는 영혼의 불멸 (Eternal Soul)을 전파하다가 죽었다! 그가 부활했는지는 나는 모름”에서 올리겠다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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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올림
그레고리 라일리의 [신의 강] (The River of God)의 부제는 “기독교기원에 대한 새로운 역사” (A New History of Christian Origins)이다. 라일리는 기독교의 기원을 알려면 강 하구 어귀 (estuary)만 보기보다는 이런 큰 강물을 이루게 한 다양한 물줄기를 살펴봐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 강줄기의 하나는 바로 예수의 유일신론(monotheism)의 형성과 발전 중에서 중심축을 이루는 “불멸의 영혼” (eternal soul)의 발견이다. 어떤 이는 유신론적 이원론을 깨고 무신론적 일원론을 형성한 대표적인 인물로 예수를 들지만, 이것은 “아직까지는” 근거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라일리는 그 반대로 예수는 일원론의 종교지형에서 이원론적 종교지형을 확실하게 촉발시킨 인물로 그리고 있다. 이 글은 라일리의 영혼관을 다 다룰 수 없고, 예수 이전의 종교지형, 예수의 영혼관 형성, 그리고 그 중요성를 다룬다.
예수 이전의 두 종교지형
1) 인간의 불멸의 영혼이 없다.
메소포타미아, 이스라엘, 그리고 초기 그리스 지역에서 형성된 종교관은 일원론적 우주관 (monistic universe)이다. 여기서 일원론이란 이원론과 대립적 개념으로서 우주는 여러 형태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원리(principle) 또는 실체(substance)만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원론적 우주관에 따르면, 신과 인간은 확연히 다르며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mortal) 운명을 가졌다. 길가메쉬 신화에 따르면 인간이 영생 (eternal life)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죽어 없어질 존재에 불과하다. 성서의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도 에덴 동산에서 순종하지 않아서 영생의 가능성을 상실했다. 즉 신은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이며 인간의 삶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신관과 인간관은 가장 오래된 히브리(유대) 전통으로서, 죽음은 인간의 본질이자 최종적인 것이다.
2) 인간의 불멸의 영혼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이스라엘, 그리고 호머시대의 고대 그리스와는 달리, 사후세계를 가르친 종교는 이집트, 조로아스트교 그리고 후기 그리스 사상이다. 이들은 죽은자의 심판이나 사후세계에서의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가르친다. 이집트는 기원전 약 2100년부터 사후세계나 죽은자의 심판에 대한 관념을 갖기 시작했다. 고대 페르시아 (지금의 이란 지역)에서 나온 조로아스트교 (Zoroastrianism 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에도 조로아스트교가 묘사되어 있음)에 따르면, 인간은 죄없이순수한 상태로 이성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서 신(God)과 악마 (Devil)의 두 영 (the two spirits)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선과 악을 분별 (착한 생각, 착한 말, 착한 행동 그리고 참됨, 자선, 정의, 교육, 일 등) 할 수 있는 윤리(ethics)는 조로아스트교의 중심사상이었다. 그렇지만 조로아스트교는 기독교와 같은 대속이나 용서 등의 개념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사후에 영혼은 천사장겪인 미트라 (Mithra) 앞으로 나아가서 현세의 삶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 착한 영혼은 낙원에 이르고 악한 영혼은 지옥에 떨어진다. 이집트와 페르시아는 이러한 영혼과 사후 운명관을 발전시키는데 공헌을 한다.
이집트와 페르시아와 더불어 영혼불멸의 사상을 발전시킨 것은 바로 그리스 사상이다. 영혼 (soul)은 희랍어로 “프쉬케” (psyche)라 불린다. 원래 이것은 “숨”(breath) 또는 “바람” (wind)을 의미했는데, 사람이 마지막 숨을 다하면 (죽으면), 하데스 (Hades)라는 곳으로 간다. 그런데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에 등장한 영혼에 대한 새로운 관념 (conceptions)은 인간의 “내면의 영혼” (whole inner person)을 강조한다. 이것은 당시의 과학적 지식에 근거한 새로운 사상이다. 이 내면의 인격이야말로 인간을 구성하는 핵심이 된다. 이러한 영혼관의 발전은 기독교 사상의 가장 중요한 원리중의 하나다라고 라일리는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신과 인간의 본질은 바로 “영적 속성” (spiritual entities)을 갖고 있다는 발견이다. 이 영혼관은 일원론 (monism)에서 이원론 (dualism of body and soul)으로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즉 몸이란 영혼을 보호하는 외피 (enclosure)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혼은 몸이 있기 전에도 존재했고 사후에도 존재한다. 이러한 영혼관은 플라톤에 와서 만개한다. 플라톤은 천상에 속하고 불멸하는 영혼은 곧 사라질 지상의 몸과 다르며, 몸을 믿고 환생을 해도 또 몸을 버리고 죽어도 존재한다. 영혼은 불멸이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서도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의 영혼관
영혼불멸관은 민족들간의 평등사상을 고취시키는 근간이 되었다. 라일리에 따르면, 몸(body)과 영혼(soul)의 이원론 (dualism)은 기독교의 기초가 된 가장 중요한 터전이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이원론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without it [dualism], Christianity would not exist)라고 과감히 주장한다. 유일신론은 다양한 문화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등을 가져오는데 기여를 했고 이와 병행하여 발전된 새로운 인간관은 “영혼의 불멸” (eternal soul)관도 신체적 계급적 차별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간은 단지 신이 질그릇에 생명의 숨길을 불어넣어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상에 예수는 반대한다. 예수 자신의 인간관은 바로 몸과 영혼의 영혼의 이원론 위에 서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종교지형에 볼 때, 혁명적인 전환이다. 예수 이전의 옛 인간관은 기본적으로 인간은 물질적 존재(material beings)에 기초했다. 즉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질그릇에 공기를 불어 놓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새 인간관은 공기가 들어간 질그릇으로서의 생명체가 아니라 질그릇과 확연히 구분되는 “실재적이고 실체적인 영혼”이라는 것이다. 이전의 인간관이 몸으로서의 질그릇를 강조했다면 새 인간관은 질그릇이라는 껍질을 두루고 있는 영혼을 강조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껍질로서의 몸은 땅에 묻히고 영혼으로서의 사람은 계속 산다는 것이다.
새로운 영혼관이 형성되기 이전에 이스라엘인들은 당시 가나안이나 근동의 종교문화, 즉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 (no souls)을 갖고 있었다. 당시의 사후관이란 기껏해야 사람이 죽으면 실체가 희박한 유령 (insubstantial ghosts)로서 지하세계로 내려는 가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일단의 작은 유대인 집단이 페르시아 사상 (신과 악마의 투쟁)과 그리스 사상 (몸과 영혼의 분리)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당시의 무덤의 비석에 세겨진 문자에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떠한 믿음도 없었다는 것을 본다면, 예수의 영혼불멸과 사후 세계 개념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The vast majority of people of his day, Jew or Gentile, did not believe in souls or the afterlife; yet that belief is fundamental to the message of Jesus).
이렇게 열혼불멸과 사후세계가 발전된 환경 속에 예수가 태어난 것이다. 라일리는 이렇게 물이 풍부한 (종교적 관념들이 풍부한) 강에 예수가 노출되었다는 것 (Into the world came Jesus. His geographical home ground, Galilee, gave him a number of advantages, from the viewpoint of access to the richness of the River of God—advantages that were much less available in Jerusalem and Judah)을 강조한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영혼불멸을 믿지 않은 성전체계의 핵심 계급 사두개파 사제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사두개파인들은 전형적으로 내세보다는 현세 중심었고, 사후세계의 심판을 믿지 않았다 (After the Exile, right through the entire conceptions as expressed in the Torah—that is, a this-world orientation of rewards and punishments with no afterlife. Theis was the view of the Sadducees, the sect that held most of the power in the time of Jesus).
당시 주류 유대교인 사두개파와 달리 예수의 가르침은 몸과 영혼의 이원론이었다 (Fundamental to the teaching of Jesus was the dualism of body and soul). 이것을 라일리는 “종교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는 천재였고--학자들이 주요인물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볼 때—그의 이원론은 유일무이했다”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field of religious studies, Jesus was a genius—what scholars call a master figure—and his dualism was unique)라고 일갈한다. 영혼에 대한 강조가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갔듯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도 영혼에 대한 강조 때문에 죽었다.
그러면 왜 예수는 물질적인 보다는 영적인 것에 우위 (the emphasis that Jesus placed on the dualism of body and soul) over against the material) 를 두는 몸과 영혼의 이원론에 목숨을 걸었을까? 예수 이전의 일원론적 문화 (monistic cultures)는 현세적이며 물질적 풍요 또는 부 (wealth)와 관련하여 신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예수는 참된 부 (true wealth)는 돈이 아니라 착함과 자선이었다.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죽일 수 없다는 자각에 그의 사역에 기초가 되었고 초기 기독교 순교사는 이런 면을 담고 있다.
마치면서
그레고리 라일리의 책 [The River of God]는 이 게시판을 도배하는 어느 신학도의 참고문헌에 들어가 있다. 그는 예수는 무신론자였으며 성전체제의 유신론자와 대항하다 죽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한다. 그것도 자신이 인용한 책을 깡그리 무시하고 말이다. 그가 인용한 라일리의 다른 책 [One Jesus, Many Christs: How Jesus Inspired Not One True Christianity, But Many] 어디에서도 예수가 무신론자였다라는 말이 없다. 오히려 예수는 육체 대신 영혼 우위를 강조한 영혼불멸론자라였다는 것을 확증한다.
역사적 탐구와 신학적 사색은 완전히 구분되어야 한다. 신학적 입장이 비판적 사고없이 과거에 투영될 때 이것은 역사에 대해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죄를 씻기 위해서는 역사적 탐구에 대한 유연성을 갖는 것이다. 역사적 탐구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라 새로운 자료의 발견과 검증을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 그러므로 오세훈 서울 시장의 황당한 표현인 “기억앞에 겸손” 하지 말고 자료 앞에 겸손해야 한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러한 열린 마음과 태도는 바로 지식의 민주화를 의미한다. 나의 신학적 입장만을 고수하면 결국 자기가 인용한 자료에 내용을 보지 못하는 누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가 글을 쓸 때 나와 다른 자료 또는 증거 (counterevidence)를 고려 할 줄 알 때 그 글이 건실한 (sound) 것이다. 그리고 옹고집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결국 그런 옹고집은 새로운 근본주의를 낳는다. 현재 이 게시판의 종교담론은 이른바 진보근본주의와 보수근본주의의 옹고집 쌈만 있을 뿐이다. 그들은 계몽 밖에 있는 사람들이다. 즉 아무리 계몽을 해도 안된다는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