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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동 예쁘장한 소녀의 시끌벅적한 가족사
작성자 clipboard    지역 Calgary 게시물번호 4206 작성일 2011-06-24 17:36 조회수 4406
유튜브는 펌 ------------------------ 1953 년 10 월 어느 날, 서울 고사북동 (지금의 성북구 보문동) 언덕배기에 웬 젊은 부부가 코흘리개 계집아이를 하나 데리고 나타났다. 이사를 온 것이다. 키가 작고 가무잡잡한 남자는 이사 온 날 이후에는 어찌된 일인지 코빼기도 볼 수가 없었다. 남자보다는 훨씬 젊어 보이고 키도 커 보이는 부인이 아침이면 수돗물을 길러 다녔다. 사는 꼴이 말이 아닌데도 항상 표정이 밝았고 웃는 얼굴로 동네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곤 했다. 오전 10 시쯤 되면 딸인 듯 한 조그만 계집아이가 아랫동네가 내려다 보이는 집 밖 언덕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언제나 같은 노래의 한 구절만을 반복해서 부르곤 했다. “~ 삼천리 강산에 새 봄이 왔구나~ 농부는 밭은 갈고 씨를 뿌린다~ “ 아직 소녀라고 부르기에는 이른 그 아이 집에 찾아 오는 친척은 대개 외가 식구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막내 이모와 외할머니가 함께 살다시피 했다. 헌데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그 아이는 외할아버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외할아버지가 죽었거나 멀리 외국에 나가 사는 것도 아니었다. 외할아버지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 같았고, 외할머니가 왔다 갔다 하는 걸로 봐서는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게 분명한데도 집으로 찾아 오지도 않았고 인사 드리러 가잔 말도 없었다. 그 아이는 그게 이상했다. 나중에 철이 들 무렵에는 외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몹시 궁금해 지기도 했지만 사려 깊은 아이였던 만큼 그 이유를 어른들에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 아이의 외할아버지는 충청북도 옥천의 거부였다. 이름은 육종관이다. 본처인 이경령 외에도 다섯 명 가량의 걸프랜드가 따로 있었다. 당시에는 이런 걸프랜드를 가리켜 첩(妾)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여섯 명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선가 한 명을 내치는 바람에 다섯 명이 된 것이다. 그 중 한 명은 일본 여인이었고, 다른 두 명은 놀랍게도 자매지간이었다. 그 자매는 개성 출신이었는지 둘 다 <개성집>으로 통했다.   육종관은 본처인 이경령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두었다. 아들 이름은 육인수, 큰 딸이 육인순, 둘째 딸이 육영수, 막내 딸이 육예수였다. 본처인 이경령 외에 다른 다섯 명의 여자들이 낳은 열 여덟 명의 자녀를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육종관의 자녀들은 1 개 소대 병력에 좀 못 미치는 총 22 명인 셈이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됐던 그 해 (1953. 7.27) 가을에 고사북동 언덕배기 적산가옥으로 이사 온 코흘리개 계집아이는 육종관의 둘째 딸 육영수의 소생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외가 식구들 중 알거나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모 두 명과 외삼촌, 외할머니 이경령 뿐이었고, 각각 다른 할머니들에게서 난 열 여덟 명의 이모와 외삼촌들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들은 적조차 없었다. 그 아이의 외할아버지 육종관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가 않은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자료 두 개를 꼽으라면, 박목월이 쓴 <육영수 여사>와 대구매일신문이 연재한 적이 있는 <청년 박정희>를 들 수 있다.   친일시인과 친박언론이 쓴 이 전기들은 의외로 육종관에 대해 놀라운 사실들을 <마지못해> 진술하고 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육종관은 일제시대에 대지주로서 소작과 정미소와 양잠업 등을 대규모로 운영하고 있었다. 1920 년 대 그는 옥천군내에서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소작료를 한 푼도 깎아주지 않는 악덕 지주로 유명했다.’ 육종관이 악덕 친일지주였다는 사실은 숨길 수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므로 어용<전기>들 조차 그 사실을 은폐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그 어용전기들은 이런 변명을 늘어놓았다. 즉 육종관은 악덕지주였지만 그의 부인 이경령이 평소에 동네 사람들에게 후덕하게 대했기 때문에 해방 후 봉변을 모면했다는 것이다. 이경령의 <후덕함>덕분에 육종관이 분노한 소작인들로부터 봉변을 모면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해방 후 보복을 피해 잠수를 타며 도망 다녀야 했다는 사실이다.     육종관의 의 맏딸 육인순은 홍순일과 결혼했다. 육종관의 사위이자 <고사북동 계집아이>의 생모 육영수의 형부인 홍순일은 일본 괴뢰정부인 위만주국의 고등문관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행방불명 됐다. 북한 점령 당시 북한 당국에 의해 친일 혐의로 체포돼 연행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훗날 홍순일의 처제 육영수의 남편이 된 박정희는 같은 위만주국 주둔 관동군 장교를 지냈지만 홍순일을 동서로서 대면할 기회는 없었다. 육종관에게는 형제들이 있었는데, 큰 형인 육종윤은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해 아예 이름을 나리타 코쿠준으로 바꾸어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살았고, 둘째 형 육종면은 일본에서 로스쿨을 나와 일제시대에 판사로 재직했다. 어떻게 보면 그 아이의 외가 쪽은 온통 일본 제국주의 덕에 승승장구한 집안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왜 외할아버지 육종관을 만날 수가 없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 아이의 부모, 즉 박정희와 육영수의 결혼에 얽힌 평범하지 않은 내막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인천상륙작전이 있고 나서 약 1 주일 후인 1950 년 9 월 21 일 저녁. 부산 영도의 어느 제과점 구석 자리에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마주 앉아 있었다. 20 대 중반으로 보이는 단아한 용모의 아가씨는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결심한 듯 눈을 들어 앞에 앉은 남자를 하염없는 눈길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결혼 제의를 수락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여자가 남자의 결혼제의를 수락 한 것이라기 보다는 남자가 내일 (9 월 22 일) 당장 대구로 떠나야 했으므로 떠나기 전날인 이 날 저녁 제과점에서 만나 결혼을 다시 합의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 해 8 월 부산 영도에 있는 여자의 피난 셋집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첫 눈에 서로 눈이 맞아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였다. 남자 보다는 여자가 더 적극적이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의 남진에 밀려 패색이 짙어가던 1950 년 8 월 어느 날, 자기 부관인 소위 송재천의 소개로 부산 피난 셋집으로 인사를 간 박정희 소령은 그곳에서 여자의 아버지인 육종관과 어머니 이경령을 만났다. 박정희를 소개한 송재천은 이경령의 조카이자 육영수의 이종오빠였다. 그 날 이 집에는 육종관 이경령 부부와 송재천 육영수, 그리고 육영수의 동생이자 육종관의 막내 딸인 육예수가 있었다. 육영수는 그 날 밤 ‘남자가 어떠냐’는 동생 육예수의 물음에 이런 대답을 했다. “눈빛이 번쩍번쩍한 게 굉장히 무서웠어…… 그런데 구두 끈을 매는 뒷모습이 믿음직해 보이더라”         그런데 얼마 후 문제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가타부타 말이 없던 아버지 육종관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기를 쓰고 딸의 결혼을 결사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어용<전기>들의 공통된 진술은 육종관이 딸의 결혼을 반대한 이유를 두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는 전쟁 중에 딸을 군인에게 시집 보내는 것이 안쓰러워서였고, 둘째는 여태까지 고분고분하던 딸 영수가 갑자기 남자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 모습을 보고 배신감을 느껴서였을 거리는 것이다. 그러나 sarnia 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첫째, 전쟁 중이어서 딸을 군인에게 시집 보낼 요량이 아니었으면 이종조카인 송재천의 중매제안이 있을 때부터 거절했을 것이다. 둘째, 아무리 딸에게 배신감을 느꼈더라도 고작 그런 이유로 세월이 흘러 사위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 까지, 심지어 죽기 직전까지 딸 부부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여기에 대한 sarnia 의 분석 결과는 이렇다. 그는 1950 년 여름 박정희를 만난 이후 그에 대한 뒷조사를 따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그럴만한 재력과 인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조카 송재천과 부인 이경령도 박정희가 처자식이 있는 기혼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육종관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육종관이 딸의 결혼을 반대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박정희가 기혼자라는 사실 때문이었으며 자기 딸과 혼담이 오간 그 시점에는 박정희가 본처인 김호남과 법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엄연한 기혼자였음에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자기 딸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격노하게 만들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박정희가 김호남과 이혼을 한 것은 1950 년 11 월인데, 대구에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린 날짜는 1950 년 12 월 12 일이다. 육영수와의 결혼을 위해 김호남과의 이혼을 급하고 강제적으로 밀어부친 게 분명해 보인다. 이상한 것은 박정희가 1948 년경 당시 이화여대 아동교육학과 1 학년 재학생이었던 이현란과 결혼하려고 했을 무렵에도 본처와의 이혼을 시도했었는데, 부인 김호남의 강한 반대로 성사시킬 수 없었던 이혼을 이때는 어떻게 성사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박정희가 육영수의 가족과 첫 대면을 한 것은 부산 피난 시절인 1950 년 8 월이었고, 그때부터 두 사람이 사귀면서 혼담이 오갔으니 아버지 육종관의 입장에서는, 딸이 처자식이 엄연히 있는 유부남과 불륜 행각을 벌이는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 때문에 딸의 결혼을 극력 반대했을 거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시끌벅적한 가족사를 배경으로 태어난 ‘고사북동 그 때 그 아이’가 내년이면 만 60 세가 되고, 아울러 대한민국의 제 18 대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물론 박근혜 씨의 가족사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 그가 책임 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리고 적어도 나 개인적으로는 박근혜 씨 가족사가 그에 대한 나의 지지-반대 여부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전혀 되지 않는다. 다만 이제부터 그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자료들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한 번쯤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는 참고사항 정도랄까?     사실 sarnia 는 박근혜 씨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가, 그가 그래도 대한민국의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라는 사실에 자극 받아 그의 1974 년 8 월 15 일부터 1979 년 10 월 26 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열람부터 틈틈이 해 보려고 작정했었다. 근데 이 공부는 아무래도 캐나다에서 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올 가을 한국에 나가서야 비로소 풍부한 자료와 취재원(?)을 만날 수 있게 될 것 같다. 박근혜 씨는 자기 어머니 육영수가 죽은 직후부터, 다시 아버지가 죽고 유신정권이 끝날 때까지 퍼스트레이디였던 자기 어머니 육영수가 했던 역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극적인 정치적인 활동을 수행했다. 나는 (비록 대한민국의 현역 유권자는 아니지만) 한민족 공동체 구성원이자 예비역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유신시대 행적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재검토하고자 한다. 아울러 그가 유신시대에 수행한 성인으로서의 <자발적> 행동에 대해 지금은 어떤 평가를 스스로 하고 있는지 듣고 싶기도 하다.           2011. 6.24 (MST) 17:15 sarnia (clip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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