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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신화이다!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8654 작성일 2015-12-05 18:47 조회수 2320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신화이다. 동정녀 탄생 신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또한 신화는 문자적으로 믿는 이야기가 아니라 당대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이야기다.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예수의 신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성서의 예수탄생 이야기들을 재해석한 지혜의 말들이 있다: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18:3) “하느님은 온종일 무엇을 하는가? 출산한다. 영원으로부터 산모 자리에 누워 출산하고 있다.”(마이스터 에카르트)  “하느님은 아버지 만은 아니다. 사랑스런 아기를 바닥에서 올려 안는 어머니다. 삼위일체는 어머니 치마폭 같다. 그 안에서 아기는 집을 발견하고 어머니 가슴에 머리를 기댄다.”(막데부륵의 메헤틸드) “하느님은 자연의 참 아버지요 어머니다. 전능한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요, 전지한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하는 어머니다.”(노리치의 줄리안)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낳은 것이 나도 나의 때와 나의 문화 속에 하느님의 아들을 낳지 않는다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마이스터 에카르트) “사랑과 순결하고 신실한 양심으로 마음과 몸 안에 그리스도를 품고 다닐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다. 그리고 모범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일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낳는다.”(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창조 과정은 여성적 성격이 있고 창조 작업은 무의식적인 깊은 곳에서 솟아난다. 말하자면, 어머니들의 영역에서.”(칼 융) “생명을 못 낳을 사람은 없다. 영혼마다 깨달음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그것은 신비스럽게 숨어 있다. 어떤 사람 안에서는 그 씨앗이 자라고 어떤 사람 안에서는 썩는다. 더러는 생명을 낳고 더러는 유산한다. 더러는 깨달음을 낳아 기를 줄 알고 더러는 그렇지 못하다.”(랍비 헤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로 의도되어 있다. 하느님은 항상 태어날 필요가 있다.”(마이스터 에카르트) “하느님은 영원하다는 말은 하느님은 영원히 젊다는 뜻이다.”(마이스터 에카르트) “있음이 본디 거룩할진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제외한 구원이란 없다.”(떼이야르 드 샤르댕)

 

일찌기 창세기 저자는 태초로부터 이 우주에는 창조성’(Creativity)의 신성(Divinity)이 있었다고 깨달았다그리고 이 창조성을 하느님이라고 불렀으며,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지니고 창조되었다고 기록했다. 참 사람 예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이 있고 사람들은 하느님 안에 있다고 가르쳤다. 사도바울은 하느님의 영이 있는 사람의 몸이 성전이라고 가르쳤다. 한국 기독교의 선구자 류영모 선생은 인간은 태초로부터 하느님의 영 즉 하느님의 얼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탐욕과 욕정과 이기심으로 인해 자신의 얼나, 참나, 진실한 정체성을 잃어 버리고 짐승과 같은 몸나, 제나가 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얼나, 참나를 되찾는 것이 삶의 의미와 목적이고, 이것을 위해 자신의 내면 속에 얼나를 잉태하여 출산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조상들은 인간의 내면에는 태초로부터 신성이 있고 그 신성은 몸과 마음을 통해서 외부적으로 드러나고 흘러 나오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고 하느님의 법칙이라고 확신했다. 다시 말해, 인간의 탄생은 하느님의 형상의 탄생이며, 하느님의 신성함의 탄생이며, 하느님의 창조성의 탄생이다. 하느님의 실재이며 형상인 창조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내면에서 신성을 잉태하고 신성을 외부적으로 출산하려고 태어났다. 인간은 태어나는 것이 성스럽고, 사는 것이 성스럽고, 죽는 것이 성스럽다. 하느님을 지니는 것은 인간의 권리이며 책임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독교 교회는 신성을 탄생시킬 권리와 책임인 창조성을 무시한채 엉뚱하게도 초자연적이고 물질적이고 인격적인 하느님, 징벌하는 이분법적인 하느님, 제국적인 하느님, 준엄한 가부장적인 하느님의 외형적인 형상을 만들어 그 앞에 엎드려 예배하며 정치적으로 창작한 죄와 용서와 구원의 공식인 대속론의 노예가 되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원죄론은 예수의 정신에 크게 위배되는 신앙이다. 이것은 인간의 내면에 하느님을 잉태하고 외부적으로 하느님을 출산해야하는 어머님됨의 의미와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과거의 패러다임인 가부장적 전통과 교리는 하느님의 모성의 특성과 여자건 남자건, 기혼자건 독신자건, 이성애자건 동성애자건, 인간의 내면의 모성을 발전시킬 중대한 책임을 심각하게 거부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다고 선언한 14세기의 기독교 신비가 에카르트가 깨달았듯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어머니로 살아가야 한다. 랍비 헤셀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어머니가 잠재한다고 확신했다. 탄생은 부모의 어느 한쪽에서 일어날 수 없고, 아버지 혼자 아이를 낳을 수 없다. 남자이건 여자이건 사람마다 하느님의 어머니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심리학자 융이 말하듯이 창조는 어머니 영역에서일어난다.

 

21세기의 현대 사회는 모성적으로 양육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고, 특히 기독교 교회는 어머니 하느님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 하느님의 모성 전통은 이미 구약 시대에 풍부하게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 도처의 전통들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15세기의 기독교 신비가인 힐데가르드는 신성은 바퀴, , 통짜와 같다고 말했다. 즉 하느님은 하늘에서 땅 아래로의 수직선의 이미지보다는 둥근 이미지이며 마치 어머니의 치마폭과 같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다고 깨달았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은 하느님의 조건없는 사랑에 감싸여 있다. 감싸고, 끌어안고, 포용하는 우주적인 하느님은 만인을 환영하는 어머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느님 안에 감싸이는 것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출산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1세기에 기록된 마태, 누가, 요한 복음서들의 첫 번째 성탄절 이야기들은 이러한 심층적인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성탄절 이야기들은 교리적으로 예수의 신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낳은 것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자신의 시대와 문화 속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놀라운 선언이다.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낳은 것처럼 기독교인들도 지혜와 사심없는 사랑을 잉태하고 출산함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기쁘고 좋은 소식(복음)이 될 수 있다. 지혜와 사심없는 사랑을 낳는 것은 하느님을 낳는 것이다. 오늘 전쟁과 빈곤과 질병과 생태계의 파괴로 심각한 위기에 빠진 인간의 집 지구는 하느님의 출산이 절실히 필요하다.

 

21세기에 이 땅 위에는 하느님이 아직 태어나지 못한 곳이 많다. 함께 아파하는 사심없는 사랑과 지혜가 없는 곳마다 그리고 정의와 평화와 희망과 기쁨이 없는 곳마다 하느님이 없거나 죽은 것이다. 하느님의 특성은 순결함과 어린이같음이다. 그러나 배타적이고 가부장적인 신앙과 신학에서는 귀여운 아기 예수는 일시적이고 표층적이고 감상적인 기분에 머물고 만다. 하느님이 어린이같다는 말은 인간들과 사회구조 속에서 하느님이 태어나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류는 하느님을 낳고 양육할 책임이 있다. 우주는 여전히 출산 중이고 진화중이고 확장중이며 인간을 출산과 확장으로 부르고 있다. 우주의 진화과정에서 가장 경이로운 호모싸피엔즈 인류는 이 출산과정에서 눈이 뜨여지고 귀가 열리는 의식의 전환으로 부름받고 있다. 이 시대는 하느님과 인간의 회복이 절실히 필요한데 이것은 인간에게서 잃었던 하느님의 모성과 온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어머니 역할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들은 생명을 아름답게 가꿀수 있는 예술가들이고 끊임없이 생명을 출산하는 산모들이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인종과 종교의 장벽을 넘어서서 두려움과 편견을 내려놓고 지혜와 사랑과 희망과 기쁨을 낳을 수 있고, 이 모든 것들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첫 번째 예수 탄생 이야기들의 심층적인 메시지이고, 역사적 예수의 영, 예수의 정신이 이 메시지를 잉태하고 출산했다. (참고: 고든 카우프만, ‘태초에 창조성이 있었다’, 한국기독교연구소 (2013); 고든 카우프만, ‘예수와 창조성’, 한국기독교연구소 (2009); 박영호,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도서출판 두레 (2000); 메튜 폭스, ‘원복’(原福), 분도출판사 (2008); Matthew Fox, ‘Hildegard of Bingen’s Book of Divine Works’, Bear & Company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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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5-12-05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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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 글 잘 읽었습니다. 늘봄님의 글을 보니 제가 고민하는 생각들이 여기저기 섞여 있어서 늘봄님께 직접 말씀을 들으면 저의 고민들이 많이 해소되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첫째, 제가 여쭙고 싶은 것 은 아래에서 약간 언급했듯이 역사와 신화의 문제인데요. 늘봄님은 항상 “역사적 예수” 신앙을 강조하셔서 역사적으로 이 땅에 온 예수의 신념과 설천이 역사적으로 어떤 것이었나를 그 동안 내내 강조하셨습니다. 또 “역사적 예수가 갖는 신앙”의 이슈에까지 나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아래서 늘봄님은 예수와 바울은 삼층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는데, 예수를 이상적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고 또 바울에게서 우주적 진화의 맹아도 있다고 하셔서 저한테는 와 닿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가 늘봄님은 성서를 이제는 신화로 읽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늘봄님의 역사적 예수 추구와 신화적 예수 이해에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삼층적 세계관을 가진 예수와 바울은 그들의 사고와 활동도 이런 세계관의 틀 안에서 이뤄졌을 것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둘째, 늘봄님은 종교는 인간의 뇌작용에 불과하다고 여러 번 말씀(제가 기억하기론 최소한 2번) 하셨는데, 칼 융은 인간의 영혼이 뇌작용이 아니라고 보고, 이런 주장에 강력히 반대해서 그가 인간의 영혼을 탐구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상반된 생각을 늘봄님은 어떻게 이해하시는지 알고 싶구요. 아래에는 프로이트의 심리의 창조성을 강조하셨는데, 아래에서 소개해 주신 책 3분의 2를 읽어봐도 그런 내용이 없었고, 또 융과 프로이트는 개인무의식을 넘어서는 집단 무의식의 영역에서는 거의 상극입니다. 위의 글에서 보면 늘봄님은 융의 심리학적 전제, 집단무의식을 받아들이시는데 이것이 뇌작용과 어떤 관계가 있나요? 늘봄님께서 인용하신 유영모선생도 그런면에서 융과 다르지 않다고 보구요. 제 질문을 다지 정리하면, 늘봄님께서 주장하는 종교는 뇌작용이라는 것과 융의 영혼의 관계가 양립가능한지 , 그리고 프로이트와 융을 이렇게 쉽게 함께 섞어서 사용하시는지 궁금해집니다.

이상, 제가 질문을 많이 하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이 두개만 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늘봄님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저는 늘봄님께서 말씀하신 여러 이슈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상태라서 늘봄님께서 이런 글을 올리시니 잘 아실 것 같아서 질문을 드리는 것이니 헤아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래서hvacman님께서 토론다운 토론을 하라고 강조하셔서, 저도 그 분의 제안을 적극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늘봄님의 글의 맥락 안에서 질문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늘봄  |  2015-12-06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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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가 깊이 생각하지 못한 점들을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예수와 바울은 삼층 세계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우주진화 세계관의 시각에서 예수와 바울의 말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고대의 성서저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신화라는 문학형식으로 기록했습니다. 저의 욧점은 단순합니다. 21세기의 현대인들은 고대문서들을 뒤덮고 있는 신화를 벗겨 내야합니다. 신화를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시대적 착오입니다. 언어의 한계인 신화를 오늘의 세계관에 따라 재해석해서 현대의 이야기로 전환해야 합니다. 제가 학교에서 그리고 Jesus Seminar 학회를 통해서 배운 역사적 예수 탐구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유영모, 프로이트, 융 등의 관계를 깊이 파고 들어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다만 몸과 영/혼/정신 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저는 진화뇌과학자들의 연구를 인정합니다. 신화는 믿는 교리가 아니라 사는 지혜입니다. 아마도 먼 미래에 저의 후손들이 오늘 저의 이야기를 읽는다면 그들에게 신화가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부탁 드리자면, 저의 글에 대해 질문하시는 것도 감사하지만, 저의 글에 반대이든 찬성이든 내사랑아프리카 님의 생각을 소개해 주시면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으까요.

prosperity  |  2015-12-06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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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천년전에 기록된 성경, 즉 "인간이 기록한 신화"를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시대적 착오이니 오늘의 우주 진화 세계관의 시각으로 재 해석하여 현대의 이야기로 전환하여야 한다는 논지로 늘봄님이 주장하시는데 재 해석을 종교적 지식이 많으신 종교학자나 성직자 여러명이 토의하고 합의하며 새로운 성경 재해석본을 작성하지 않고 각자 자유의사로 재 해석한다면 각자의 해석이 달라 엄청난 혼란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재 해석이 모두 "이단"이 되겠지요. 늘봄님의 재해석과 아프리카님의 재 해석이 저의 재 해석과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5-12-06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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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 안녕하세요. 저도 예수와 바울이 당연히 삼층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저의 이해는 바트 어만을 따르는 편입니다. 저의 이러한 예수에 대한 이해는 콘스탄틴 이전의 주류기독교인들이 예수와 바울의 세계관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 세미나나 마크스 보그를 따르시는 늘봄님의 견해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신화의 문제는 더 신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불트만의 탈신화화(demythologization) 기획은 신화의 종말로 끝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그의 책 [그리스도교 사상사]에서 불트만은 신화를 모른다고 비판했습니다. 일종의 또다른 문자주의라는 것이죠. 저는 늘봄님의 글을 보면 틸리히가 불트만을 비판한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늘봄님의 글에서 또다른 형태의 문자주의를 보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늘봄님은 문자주의를 비판하시면서 우주적 하느님, 우주적 그리스도, 새로운 영성을 하시는 것을 보면서 늘봄님은 탈신화화가 아닌 재신화화(remythologization) 작업을 하게 됨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종교를 떠나지 않은 이상 재신화하는 불기피하니까요. 종교학적으로 보면, 탈신화화와 재신화화는 불가피합니다. 통일교는 기존의 기독교 전통을 탈신화하고 문선명목사를 중심으로한 새 메시아론을 제시하면서 재신화화를 주창하고 있습니다. 인도계 종교다원주의 신학자 레이먼드 파니카가 "재신화화"를 주장하는 것도 바로 우리가 종교라는 현상에 있는 이상 재신화화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늘봄님께서 신화를 재해석하자는 것도 늘봄님께서 싫어하시는 근본주의적 신화론을 극복(탈신화화)하고 진화론적 영성(재신화화)으로 나아가시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여기서는 종교적 진리주장(truth claim)을 하기 보다는 종교에 대한 이해의 장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볼 때, 늘봄님의 종교논의의 대상은 기독교근본주의자보다는 저처럼 종교를 공부하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늘봄님은 지속적으로 근본주의신학을 비판하시지만, 이것처럼 비판하기 쉬운 것은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한 번 더 거론하겠습니다.

늘봄님은 제가 제 생각을 밝히라고 하셨는데 저는 지난 10여년 동안 충분히 많이 이야기 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시에 대하여, 은유에 대하여, 신화에 대하여, 동성애에 대하여, 종교를 이해하는 태도에 대하여, 근본주의에 대하여 등등 피력했구요. 아래 단테에 대한 것도 저의 의견입니다. 늘봄님께서 천국 지옥은 교회권위주의자들의 은폐와 거짓이라고 하셔서 그렇지 않은 면을 보여 드린 것이구요. 예를 들어 늘봄님은 교리를 비판하시지만, 교리는 모든 종교에 불가피한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적 예수를 논할 때 교리의 폐해에 대해서 논할 수 있지만 이것은 서론이지 본론이 아닙니다. 로버트 펑크의 글 보면 , 역사가로서 보다는 신학자로서의 입장이 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가들의 역사적 탐구는 어떤 신학적 입장을 떠나서 역사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합니다. 당연히 교리적인 부분은 걷어내야죠. 우리가 호머의 서사시나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보지 않고 전후 맥락이나 다른 문헌을 참조하듯이, 근본주의적 신앙과 싸우지 않아도 역사적 예수를 탐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 세미나를 말씀하시는데, 예수 세미나가 역사적 예수를 독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예수 세미나는 순수 학자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평신도, 목회자, 학자들의 모임입니다. 오히려 역사적 예수의 탐구나 성서 연구는 최대의 성서연구 단체인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SBL)에 더 주목해야 합니다. 매년 북미에서 열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칸프런스인 “American Academy of Religion”에 예수 세미나 사람들이 여러 세션을 열어 모임을 갖습니다. SBL의 학자들이 교회에 눈치보고 역사적 예수 연구하지 않구요. 교회에서 보수적인 교회에서 교역자들이 성서비평학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밥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믿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들 소신으로 역사 비판학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진보교단에서 배운 교역자들이 자기 교단 내의 보수적인 교회에서 성서비평학을 공공연히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늘봄님의 성서비평학을 가르치신 용기는 훌륭하셨다고 보구요. 저 역시 지금은 아니지만 교회에서 일할 때, 마크스 보그의 [Reading the Bible Again For the First Time]을 사용하다가 너무 피상적이라서 내팽겨쳐 버리고, Bart Ehrman의 두 책 [A Brief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와 [The New Testament: A Historical Introduction to the Early Christian Writings]를 사용했습니다. 어만은 한 때 보수 기독교인이었다가 스스로 무신론자로 선언한 학자입니다. 이 두 책은 정말 좋은 교재입니다. 제가 판단컨대 어만의 이 두책은 신약성서 개론을 일반인들에게 소개하는데 최고의 교재고 교인들에게 보여주었고 가르쳤습니다. 어쨌든, 계몽도 중요하지만 사태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예수 세미나의 역사적 예수가 좋은 면도 있지만, 일반인들에게 그것만 진리하고 하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것은 신학전문가가 평신도를 향해서 가하는 폭력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나의 강한 주장을 하기 전에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늘봄님의 입장을 피력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설교”가 아닌 “신학”이고 타자를 배려하는 지름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제가 알고 있는 한, 프로이트는 집단무의식을 피력한 적이 없습니다. 집단 무의식은 융의 것이구요. 프로이트와 융이 결별하게 된 것이 바로 집단무의식의 문제였습니다. 늘봄님께서 인용하신 “창조 과정은 여성적 성격이 있고 창조 작업은 무의식적인 깊은 곳에서 솟아난다. 말하자면, 어머니들의 영역에서.”은 융의 집단 무의식 이론에서 나온 것이고, 개인의 심리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원형 anima나 남성적 원형 animus는 집단무의식을 상정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개념입니다. 융은 이 집단 무의식 이론을 과거의 여러 종교나 신화적 문헌을 통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은 그의 심리학에서 가장 독창적이지만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며, 이러한 융의 심리학에 과학성에 깊은 의심을 심리학자들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뇌작용과 융의 영혼의 개념은 이런 면에서 배치되고, 늘봄님께서 이런 개념을 사용하실 때 성급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 문외한이라서 이런 개념을 볼 때 유보하는 편이구요. 바울 등의 진화론적 우주관은 설교이지 과학에 입각한 진술로 나아가기에는 갈 길이 멀다고 봅니다. 저 역시 종교적 발달 과정에 대한 진화론적 해설서들, 즉 Robert Wright의 [The Evolution of God]와 같은 주장을 좋아하지만 저의 것으로 삼지 못하는 것은 아직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적 영성도 중요하지만, 종교라는 현상에 대한 진화론적 이해가 과연 종교문화에 대한 이해에 적합한지 유보하는 것은 제가 보수적이라 그렇기 보다는 아직 확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은 자연과학의 발견을 영향을 많이 받지만, 그러한 자연과학적 발견이나 이해를 사회나 인간 이해에 적용할 때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토마님께서 소개해 주신 [지적 사기꾼]이라는 책도 이른바 주로 프랑스 철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에 대한 비판으로서 인문학에 과학을 잘못 이해하고 적용한 결과입니다. 이와 함께 사소한 역사적 사실이나 개념적 오해는 글 전체에 대한 인상을 크게 흐릴 수 있다는 점도 있다고 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두서없는 말씀을 올렸습니다. 앞으로 질정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늘봄  |  2015-12-07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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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님, 제가 생각하지 못한 점들을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저에게 질문을 던지기 보다는 저의 생각과 다른 것이나 새로운 것들을 소개해 주시면 자유게시판 독자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prosperity 님, 인간의 본성은 자율성, 창조성, 가능성 입니다. 종교체계가 만든 공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재해석하고 몸과 마음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합니다. 이렇게 한다고 세상이 혼란스럽게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함을 환영하는 지극히 민주주의적이고 우주적인 세계가 됩니다. 종교적 테러와 전쟁도 없을 것입니다. 이단이란 말은 종교체계가 권위에 저항하는 세력을 막으려고 창작한 정치적인 수단에 불과합니다. 나와 다른 모든 것을 무조건 이단이라고 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따라서 정통/이단 시비는 진부한 논쟁에 불과합니다.

prosperity  |  2015-12-07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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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과 아프리카님의 예수/하나님에 관한 글을 보고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평생 무신론자 였다가 은퇴후에 어느 계기에 예수님을 받아 들였고 전도 폭발 훈련도 받아 선교 활동도 하였는데 기독교에 깊은 이해를 갖이신 두분의 글들을 읽고 "시험에" 들어서 교회에 출석하는 목적이 상실/혼돈되여 가는 중입니다. 사후에 인간에게 구원이 있건 없건, 예수님의 살아가신 "사랑"의 길을 따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깊이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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